어디서 장난질이여.
# 제목 없음, 제 목 없음
‘제목 없음’의 ‘제목 없음’은 제목이 없다는 뜻일 테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제목이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거나 내용이 없는 건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목 짓기가 너무 어려운 탓도 크다. 그러니까 “제목”의 뜻을, 띄어쓰기를 통해 달리 해석하고, 뒤에 ‘없다’라는 용언을 붙여 “나는 목이 없다.”로 재해석! 다이어트가 절실한…….
제목을 띄어 읽으면 ‘제 목’이 된다. 즉 내 목을 말한다. 다이어트! 한 10년쯤 된 것 같은데, 결심은 수백 번 작심삼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살은 빠지는 게 아니구나! 지각(知覺)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면 그건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세속을 끊거나 다른 세상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불현듯 생각이 든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엔 간단한 곡물과 과일과 유제품으로 대체하고, 간헐적 단식이라는 종교적 의식과 비슷한 체제 안에 사는 상상을 해본다. 한 다리… 아니 이중국적처럼 거의 몸 절반이나 담그고 있는 야식의 세계에 완전히 몸을 빼어 살 수 있을까? 배달앱 체제의 각종 쿠폰과 무료 배달 서비스 따위에 질끈 묶여 폐쇄된 나의 얼!
목이 잘려 몸통과 분리된 ‘제목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목 자체가 보이지 않으니, 그 모습을 “제 목은 없음”으로 차마 현실을 일축한 자기반성쯤 될 것 같다. 하지만 진짜 반성하고 고쳐나가려는 의지가 없는 반성이라면, 결코 반성이 아니니, 그저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의 빈약한 의지를 합리화하려는 얕은 꼼수일 게 뻔하다.
이렇게 자꾸 되돌아오는 질문을 회피하고 외면하고자 애쓰는 글쓰기는 너무나 처연한 자아 성찰이 아닐 수 없다. 뒷맛이 쓰고 텁텁하더라도 차마 뱉지 못하는 자학! 장르문학의 회귀 작품과 이세계 배경의 콘텐츠를 고집스럽게 소비하는 내면에는 현실을 잊고 싶은 은은하되 강렬한 욕망이 웅크린 채 몸집을 불리고 있다. 그 욕망의 몸엔 과연 목이 있을까? “제목 있음”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