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거 사랑 아니야 상대방 기만하는 거야” 아는 형의 소개로 만난 K형이 초면에 나에게 한 말이었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나는 그 말이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먹이 오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떨떠름한 내색 정도는 비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형의 말을 겉으로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속으론 내심 그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좀처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와 여자 친구는 연애 삼 년차에 접어들고 었었다. 그리고 이 정도 시간이 쌓이자 내가 여자 친구를 보는 시선은 분명 처음과는 많이 달랐다. 아마 여자 친구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설렘의 정도는 처음보다 많이 줄어들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관계가 못 견딜 정도로 나빴던 건 아니다. 우리 사이도 특별히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불안했다. 나는 대학교 3학년 토목과 학생이었는데 전공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해 내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나는 내가 지금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곧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사는 자취방에 여자 친구가 놀러 왔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와 단둘이 방에 있음에도 그녀와 스킨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우리의 관계가 여기 까지라는 걸 알리는 결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지지부진한 진통 끝에 우리는 헤어졌다. 물론 미리 밝혀두자면 이건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 것 중 가장 최악의 선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랑에 대해 대단히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를 보면 뽀뽀를 하고 싶고 가슴이 뛰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런 내 믿음은 주변 친구, 형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은연중엔 다른 사랑을 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들이 단박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함도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내 여자 친구에게 돌린 셈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 사랑관은 틀렸다. 이 세상엔 불타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불타지 않는 사랑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만 한정했을 때도 그렇다.
최근에 읽었던 책인 <러브 팩츄얼리>는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두 가지 사랑이 나온다. 전자는 로맨틱한 사랑이고 후자는 동반자적 사랑이다.
로맨틱한 사랑 - 시간을 필요로 하는 친밀감, 취약성, 욕정 등으로 이루어지고, 헌신적인 면이 없을 수도 있다. 또한 로맨틱한 사랑의 경우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이상화가 필요하며,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점차 시들해져 간다.
동반자적 사랑 - 차분하고 안정된 사랑으로, 오래되고 성숙한 로맨틱한 관계에서 종종 보게 된다. 이 유형의 사랑에서는 두 사람 다 솔직하며, 두 사람의 관계와 복잡하면서도 모순된 각자의 특성들을 비교적 현실적인 눈으로 본다. 동반자적 사랑은 자극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의 열병보다는 헌신적인 우정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로맨틱한 사랑의 경우와는 달리, 애초부터 욕정이 없거나 잠시 있다가 사라지며, 욕정의 강도나 빈도 또한 더 낮다. 대신 두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보다 깊고 보다 편안한 끌림을 갖게 된다.
이별 후에도 내가 겪는 현실의 문제들은 여전했다. 나는 이것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점점 더 게임에 빠져들었다.(https://brunch.co.kr/@ehdusqmdl/1) 그러다 이 생활에서도 회의가 들어 백팩을 메고 집을 나왔다. 서울 도보 모임에 간다는 핑계였다. 사실은 현실 도피성 여행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전국을 걷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 또 걸었다. 그리고 제주도를 반 절 가량 돌고 앞으로 더 갈 수 있을 때가 없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나조차 스스로를 하찮게 여길 때 나를 귀하게 봐준 사람이었고 내 장점을 발견해준 사람이었고 웃는 게 너무 예쁜 사람이었다.
나는 염치없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고맙게도 그녀는 전화를 받아줬다. 물론 달가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고마웠다. 나는 그녀에게 제주도를 걷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혹시 인천에 가면 한 번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어”라고 차분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좀 더 일찍 이뤄졌다. 그녀는 전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제주도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올레길 중간에 있는 식당에서 봤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올레길을 걷다가 웃고 울었다.
다행히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다. 그동안 나는 그녀가 나에게 준 믿음 덕분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투닥투닥 싸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곧 우리가 손 잡고 다시 웃으며 걸어갈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그녀 손을 놔주지 않을 생각이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마지막 이 말을 남겨야겠다.
“HJ야 그동안 마음 아픈 게 한 거 미안해 앞으로 내가 더 잘할 게 그리고 그리고 나랑 만나줘서 정말 고맙고 많이 많이 사랑해"
참고 문헌 : <러브팩츄얼리>_로라 무차
참고 사진 : Image by István Asztalos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