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졍 Jul 09. 2021

따로 또 같이

마지막이니 한번 해봅시다

  "반장! 할 말 있다며? 애들한테?" 

  "아 맞아요 샘. 저 말해도 되요?" 

  "고럼고럼. 아침 조회 전달 사항 잘 챙겨. 반장 할 말 있데. 얘기 들어보자."

  "있잖아 우리 영어 말하기 대회 있는 거 알지? 그거 단체전도 있데. 단체전에서 우승하면 상금이 어마어마하던데 우리 반 다 같이 안나갈래? 담임샘이 상금 필요하시데."

  "야 뭔소리야.ㅋㅋㅋ 나 상금 안 필요해. 뭐 그 상금으로 내 가방도 못 사고 너네 먹을 거 사 먹을 텐데 난 아니다. 그냥 공부해. 누굴 원망하려고"

  "반장. 그거 언제까지야? 그거 지금 바로 정해야 해? 좀 우리 고민해보고 다시 얘기해보자."


  인문계 고등학교다 보니 주요 과목 부분에서 각종 대회를 자주 연다. 이번에 가장 큰 대회는 바로 영어과에서 주최하는 영어 말하기 대회.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는데 반장이 단체전으로 학급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지 제안을 했다. 아이들도 담임인 나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요 근래 들어 겨울이 다가오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고3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9월 모의고사를 본 후 자신들의 점수가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는지 가름해 주었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모고를 통해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급 분위기도 예전만큼 왁자지껄 소란스럽기보다는 조용히 묵묵했다. 그런 상황에서 반장이 제안을 한 것이다. 단체로 영어 말하기라니. 대본도 아이들이 직접 써야 하고. 콘티도 짜야하는 소위 시간을 많이 뺏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자, 8반 생각해 봤어? 나는 상금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제 곧 헤어질 거 아니야. 그리고 이제 진짜 본격 고3이니 되니까.. 우리 예전에 체육대회 응원하고 그러고 나서 내내 공부만 해 온 거 같아서. 좀 같이 쉬자고 제안한 거야. 그러니 부담 느끼지 말고 말해줘."

  "나는 해 보고 싶어. 만약 공부해야 해서 시간을 많이 못쓸 거 같은 애들은 적은 분량의 역할을 주면 되지 않을까?"

  "근데 난 끝나고 기숙사 들어가야 해서.. 연습할 시간이 없을 거 같아."

  "나도 하고는 싶은데... 시간이..."

회의를 지켜보다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은데 못하겠는 사람은 누구야? 그럼 꼭 그 애들은 나와서 같이 뭔가를 해야 해? 그 애들이 소품을 만들어 준다거나 그럴 순 없나?"라고 쓱 물었다. 

  "와. 대박. 샘. 그 방법도 있네요? 맞네. 꼭 반드시 무대를 같이 오르지 않아도 소품 만들거나 대본 작성 도와주거나 해도 되네."

  "오오 그런 거면 난 찬성. 부담 없겠다."

  "나도 좋아 반장."


그렇게 얼떨결에 8반은 단체전으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영어 말하기 대회라니... 또 얼마나 담임을 괴롭힐지 잘 알기에 그 순간이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프린트해달라, 노트북 빌려달라, 저녁에 교실 사용해도 되는지 등등을 물었다. 졸지에 교실 사용을 할 때는 나 역시 8시, 9시까지 함께 남아 임장지도를 해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일주일 넘게 연습에 매진했다. 


  "8반 너네 돈 필요해? 왜 이리 열심히 하는 거야? 진짜."

  "에이 쌤 기다려 봐요. 저희가 그때 무대 서면 다 보여드릴게요. 무슨 우리가 돈에 환장했을까요."

  "야 고2 애들이 너무 열심히 대회하니까 그러지. 공부해야지."


  아이들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오후에 30분씩, 주말에도 짬을 내서 학교에 나와서 연습을 했다. 최대한 임장지도를 할 수 있는 날에는 나 역시 함께 남았으나 아이들이 부끄럽다고 해서 그마저도 교무실과 교실을 왔다 갔다 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땀 흘리고 머리 쥐어짜내며 함께 하는 모습을 보니 몽글몽글했다. 반장 말대로 얼마 안 남은 학기라 더 아쉬웠나 보다.


  대회날, 아이들은 영어 말하기 대회를 나갔다. 대회 구경 오라는 아이들 원성에 맨 앞자리에서 영어샘과 함께 구경 중이었다. 한 학급의 아이들이 우글우글 나오니 큰 무대가 작아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러나 영어로 쏼라쏼라 하다 보니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밝은 표정의 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제외하고 다른 행사들을 진행하면 누구보다 밝고 빛나는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이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학급 아이들 전원(영어 대본 작성팀, 소품 준비팀, 디자이너팀 등)이 무대 위로 올라서 노래 부르며 안무하며 끝이 났다. 아이들의 무대가 끝난 후 많은 환호성을 받았다. 최우수상도 받았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오구 기특해라. 일주일 내내 연습한 보람이 있네."

  "우리 반 진짜 오늘 짱이었어."

  "맞아 맞아 반장 고마워!"

아이들은 한참이나 최우수상의 기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했다.


  2학년 아이들에게 늘 이야기했던 부분이 있다.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의 숙명이지만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기에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면 아주 잠시 공부를 뒤에 놔도 된다고. 그 우선순위를 해 보고 그다음 가서 펜을 잡아도 늦지는 않을 거라고. 

사실은 아이들에게 각자의 성적보다는 같이 한다는 가치, 추억, 기억, 그리고 존중과 배려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 등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현실 앞에서 늘 주저하게 되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의 교직관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몇몇 아이들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상황과 순간들이 가끔은 있었던 것이다.


  "좀 같이 쉬자고 제안한 거야."라는 반장의 말이 대부분 아이들을 움직였을 것이다. 같이 하자고 아니라 같이 쉬자.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은 이제 더이상 돌아오지 않으니까. 같이 열심히 공부했으니 쉬는 것도 같이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대회였으나 아이들은 그 순간을 즐겼다. 순위를 매기는 부분은 여느 대회와 같았으나 그 시작이 달랐다. 그렇게 또 아이들은 또 한 번 나에게 울림을 주었다.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구나 싶었다. 



  


이전 08화 물 한병의 효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