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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Sep 05. 2024

나의 인생, 나의 학교

인생 최대의 후회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이다. 학교에서 왕따도 아니었고 학교 폭력을 당한 것도 아니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싸움질하는 날라리도 아니었다. 그저 옷 좋아하고 여학생들 좋아하는 모범생과 노는 애 중간 정도의 '양아치'라고 불리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전부터 계속해서 부모님께 학교 가기 싫다고 말했던 것 같다. 여러 이야기를 했던 장면이 생각나는데, 무성영화처럼 장면만 기억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를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 아침, 나는 이불을 깐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방 문을 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는 척했다.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제도권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나고 신설동에 있는 검정고시로 유명한 수도학원을 다녔다. 수도학원이 나에게는 학교가 되어주었다. 나처럼 학교를 때려치우거나 짤린 애들이 전국에서 수도학원으로 모였다. 교실에는 나보다 어린애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만학도분들도 많았다. 문제아라고 불리는 애들이 모인 교실이라 분위기가 험악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나랑 친했던 20대 중반의 어떤 형은 고3 2학기에 학교에서 퇴학당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입술이 소시지 같아서 별명이 '소시지'였는데, 우리 반에 예쁜 여학생을 좋아했다가 차였던 기억이 있다.


"아니, 어떻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학교에서 짤려요? 웬만하면 그때는 봐주지 않나?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예요?"


 "....."


무슨 사연인지 형은 말해주지 않았다. 키도 크고 안경을 끼고 갈색 머리에 젠틀한 느낌의 형이었는데 왜 퇴학당했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제도권 밖의 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았다. 깡패는 아니었지만 깡패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가죽잠바를 입고 다니고 철로 된 쌍절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키가 작고 왜소해서 깡패 흉내를 내면서 자기를 보호했었다.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써야 했는데도, 안경을 안 쓰고 험악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토끼는 인상 써도 귀엽지만 호랑이는 웃어도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토끼같았지만 최대한 무섭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깨에 늘 힘을 주고 마른 몸이 싫어서 바지 안에 추리닝을 입고 다녔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검정고시 수도학원을 나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안 빠뜨리고 다녔다. 돌이켜보니 깡패처럼 하고 다니면서도혼자가 아닌, 갈 곳을 찾았고 함께 할 반 친구들을 찾았던 것 같다.


1년 정도 수도학원을 다니면서 고교 과정을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볼 때가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학원에서 단체로 검정고시를 접수했고 학원생들이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시험 당일 날은 가관이었다. 25년 정도 지난 일이라 지금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국가시험인데도 커닝 페이퍼가 난무했다. 특정 과목에 자신 있는 학생이 아주 얇고 기다란 종이에 답을 적었다. 그리고 BB탄 크기로 돌돌 말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커닝 페이퍼를 전달했었다. 나도 커닝 페이퍼를 만들었는지 봤는지는 솔직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감독관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커닝 페이퍼를 돌리면서 시험을 봤다. 시험이 끝나고 바닥에 작은 콩알만 한 커닝 페이퍼들이 여러 개 떨어져 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도 부정행위로 적발되지 않은 걸 보면 신기하다. 당시에는 가정환경, 경제사정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훗날 검정고시를 보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서인지 감독관들도 눈감아주고 봐주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나는 다행히 검정고시에 붙었지만 떨어진 친구들도 많았다. 과락이 40점이고 평균 60점을 받아야 했는데, 우리 반에는 공부와 담쌓은 친구들이 많았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몇몇 아이들은 검정고시 학원 길 건너에 있는 수도 대입학원으로 교실을 옮겼다. 수도 대입학원이 나에게 새로운 학교가 되어주었다.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대입은 실패한 나는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해서 겨우 지방 국립대에 들어갔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학교에 가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다. 현역 입영을 하게 되었고 군대에 가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크리스천이 되면서 인생이 변화되었다. 어두운 내 삶에 빛이 들어오는 걸 느꼈다.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평생 비를 맞고 살았던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 것 같은 평안하고 안락한 느낌으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크리스천이 되고 전역하고 복학할 때 했던 다짐이 기억난다.


'정말 한 번 열심히 해보자! 최선을 다해보자!'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았고 과대표, 학생회, 방학에는 인턴십, 전국에서 뽑힌 삼성 케녹스 멤버십, 공모전 대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고등학교 자퇴 후 들어간 대학교에서 내 인생의 꽃이 피었다.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한 순간들이 많다. 춘천에 있는 캠퍼스는 언제나 포근하고 푸르렀다. 학교 동기들, 후배들과 너무 많은 추억들을 대학교에서 만들었다. 대학교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종종 대학교를 찾아간다. 아는 사람도 없는 문화예술대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건물에 들어가 복도를 걷기도 하고 열려 있는 전공실을 구경하기도 한다. 졸업 후에도 몇 년 동안 걸려있던 나의 디자인 졸업작품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춘천에 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내 인생이 빛났던 곳을 추억하고 편안했던 마음을 느끼는 것 같다.


최근에 배민라이더 배달을 하다가 졸업한 초등학교 근처로 배달을 간 적이 있다. 배달 라이더가 되어 초등학교 교문에 서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졸업 후 30년이 지나서 음식 배달부로 서 있는 나. 그때는 몰랐겠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 동안 나의 인생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고교 자퇴, 재수, 군대, 크리스천, 연애, 대학교, 이별, 대학교 졸업, 취직, 퇴사, 공무원, 배달, 출판사, 작가, 디자이너, 인생의 키워드 중에 어느 하나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요즘 내 인생의 중간지점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실 내 인생은 망했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고 화도 나고 답답하고 겁이 날 때가 많다. 내 인생의 중간정산을 해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모습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슬퍼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조바심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뒤처져 있는 내가 실패자, 낙오자 같다. 그런데 중간지점에서 한 번 망해본 게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 힘도 없이 인생이 망했다면 어땠을지 두렵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학교가 있었다. 도망친 고등학교 뒤에는 수도학원이 있었고, 미술학원이 나의 학교였고, 나의 대학교가 있었다. 군대가 나의 학교였고, 직장이 나의 학교였다. 공무원으로 일했던 주민센터, 구청이 나의 학교가 되어주었다. 요즘 내가 표류하는 표류자처럼 길을 잃은 건 나만의 학교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대학교처럼 나를 다시 한번 일으켜 줄 나의 새로운 학교를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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