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쓰는 방명록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페이지의 제일 앞에 쓴 사람과 같은 크기와 같은 간격으로 이름을 써 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이지의 제일 처음 사람이 큰 글씨고 위아래 공간 없이 세로로 이름을 쓰면 그다음 사람도 그렇게 쓰고, 페이지의 첫 글씨가 작으면 또 거기에 맞게 작게, 성과 이름 사이를 띄워 쓰면 또 다음 사람도 그렇게 쓴다. 항상 제일 처음의 글씨가 기준이 된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서 우리는 어울린다는 이유로 남에게 맞춰나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보편적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보편적인 생각, 보편적인 행동, 보편적인 선택 등. 그리고 이런 보편적인 상황에 속해있다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이 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위안이 되고 안심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해 가며 남과 비슷하게 살아가고자 매 순간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고2 아들이 위탁교육을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담임선생님께 들었다. 고3 기간을 수험생이 아닌 외부 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아이는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했고 종종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아이를 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가 다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기다렸던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언제든 다시 공부를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본래가 똘똘한 아이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다시 결심을 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상상을 했다. 한 1~2년 늦을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가 그렇게 대학을 가면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고 마음도 여유가 생겨서 어쩌면 나와의 관계도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내가 기다림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상상이고 기대였다.
일반고 아이들 중 위탁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 아이가 그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아이가 부모와 이야기를 하고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부모와 대화가 없고 가족에 대한 신뢰가 없는 아이가 혼자 결정한 일이라 불안하기만 하다.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한 선택일까. 혹시 가족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영영 가족을 보지 않기 위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빨리 취업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욱 불안을 커지게만 한다.
아이가 보편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나는 아이의 선택을 마음 편하게 지켜볼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또 현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의 선택에서의 멋진 미래를 막연히 상상하며 기다려야 할까.
내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길이 제일 쉬운 길이고 가장 안정적인 길이라는 생각에서 보수적인 나는 생각을 더 확장해 나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이라도 나는 아이가 다시 보편적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