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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Apr 15. 2023

소비의 늪에 빠져있습니까?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카드가 막혔다. 애플리케이션으로 택시를 호출하려다 알게 됐다. 자동결제가 불가능하다. 밥 먹듯 타던 택시를 못 타게 된 건 둘째치고 당장 밥 먹을 돈도 없다. 이번 달 카드값 결제 때문에 단기 카드대출을 영끌해서 받아버려서인 것 같다. 당장 통장에 있는 돈은 카드값 내기에도 빠듯하기 때문에 절대 써선 안 된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며 빈 속과 빈 통장을 걱정했다. 사실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멍한 기분으로 담배를 피웠다. 이제 당분간 담배도 못 사니까 아껴 피워야 한다. 집에 고이 모셔둔 빈티지 에르메스 구두가 생각났다. 팔아야지. 당장 당근에 헐값으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끄고 정신없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행거 아래쪽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여름용 구두를 꺼냈다.


막상 박스를 열어 에르메스 구두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탐이 났다. 내 신세에 에르메스를 그 가격에 산 건 정말 행운이었으니까. 어디서 또 이런 물건을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망연자실하며 양말을 벗고 구두를 신어보았다. 돈은 없고, 집도 없고, 직업도 없는데 에르메스 구두를 신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아무래도 술을 마셔야겠다. 책상에 있던 1인용 레드와인 한 병을 땄다. ‘난 왜 돈이 없지?’라는 질문이 그 다음이었다. 아무래도 술과 옷 때문이다. 퇴사가 정말 간절해졌을 때쯤부터 숨 쉬듯이 옷을 사고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소비자본주의의 부품처럼 취급당하는 게 싫어서 직장을 그만뒀는데, 소비에 중독된 채 자본주의 시장 한 가운데로 나 자신을 내던진 셈이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일단 택시비가 체감할 수준으로 올랐다. 대중교통 요금도 곧 인상된다고 한다. 둘 모두 인상되는 게 당연하다. 인상되어야할 시기가 한참 지났다. 그런데 왠지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전쟁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석유가 더 부족해졌고, 이번 달은 그렇게 춥지도 않았는데 전달보다 가스 요금이 1.5배 넘게 나왔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못 먹던 위스키들을 마실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자주 가던 식당들에 메뉴 가격 인상 공지가 나붙었다. 숨 쉬듯 돈이 나간다. 보험료가 빠져나가고, 넷플릭스 정기 결제일도 다가오고, 유엔난민기구 후원비 납부일도 다가온다. 살아 있는 한 돈이 필요했다. 돈은 있으면 당연한데, 없으면 왠지 당연하지가 않다. 억울하다. 그럼에도 분수에 맞지 않게 에르메스를 산 일, 와인을 산 일을 후회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그것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그것은



‘어떡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포기하고 이런 글을 쓰는 나를 보니 돈이 없을 만도 하다. 이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옛날 시인처럼 시 한 편에 쌀이 두 말 들어온다고 기뻐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어떤 노동은 대가를 받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산다. 어떤 사람은 상식에 벗어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찾는다. 나는 반대로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소비를 하고 있다. 이것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 기른다. 돈은 버는 만큼만 써야 한다고들 한다. 나는 쓴 만큼 버느라 아등바등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게 더 당연하지 않나?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꼬박꼬박 월급 받아 돈이 차곡차곡 모이던 시절이 더 행복했던 것 같지도 않다. 대신, 소비를 할 때 자극적인 기쁨을 느끼는 인간이 되기 전으로는 돌아가고 싶다. 눈 떠서 인스타그램만 켜면, 산책하려고 집 밖으로만 나가면, 온통 내 돈을 빼앗아가려는 사람들뿐인 것처럼 느낀다. 이 광고로 가득찬 세상에서 도무지 나는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려 소비를 한다. 소비를 하지 않아도 즐거워하는 법을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뜯다가 나도 모르게 새 립밤을 뜯고 싶어졌다.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다. 그러자 오늘 인터뷰이가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하면서 '믿는 구석'이 생기게 됐다”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나는 오랜 시간 공들여 그런 관계를 만들어본 적 있나? 옷장은 여전히 터질 듯이 꽉 찼는데 마음은 왜 허전한 거지? 아! 나는 이제 가꾸는 기쁨보다 사는 기쁨에 중독되었구나. 돈으로 마음을 채우는 방법은 너무 빠르고 자극적이니까. 온갖 고생은 돈 버는 데 하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기꺼이 고생하려는 마음은 사라졌구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면 온전히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무언가를 온전히 가질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온전히 내려놓는 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게 너무 싫지만 어쩐지 그런 사람이 돼버린 거다. 빈 속에 이 와인 한 병을 다 털어넣고 나면 잡생각을 끝내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어쩐지 어쩔 수가 없게 오늘도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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