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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Apr 22. 2023

아까시나무를 아십니까?

동구밖 과수원길/ 아까시꽃이 활짝 폈네.

처음에는 꿀벌에 대해 쓰려고 했다. 담배를 피우다가 곤충을 한 마리 보았다. 처음엔 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파리 같았다. 벌을 보고 싶어서 벌로 보였나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부터 보니까. 벌을 걱정하고 있다. 요즘 꿀벌이 없어서들 난리라고 한다. 한여름마다 모기가 멸종했으면 싶지만 꿀벌은 얘기가 다르다. 한 번은 새벽에 모기를 잡으려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가 화딱지가 나서 SNS에 ‘다음 생엔 모기로 태어나 자살하겠다’는 극단적인 글을 썼지만, 마당 있는 집에 살던 시절 아버지가 잔디를 깎다가 땅벌집을 잘못 건드려 온 집안에 땅벌 떼를 끌어들였을 때는 ‘땅벌 망해라!’ 생각한 적 없다. 사실 모기도 먹고 먹히는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고리를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온갖 꽃을 수분하도록 매개하는 꿀벌은 오죽할까?


꿀벌이 사라진 건 주 영양공급원인 아카시아 나무가 사라져서라고 한다. 검색을 해 보니 아카시아나무는 사실 한국에 없고 한국에 있는 건 아카시아 나무를 닮은 ‘아까시나무’라고 한다. 학명대로 하면 ‘가짜 아카시아나무’쯤 된다고. 그러니까 아카시아껌은 아까시껌이고, “동구밖 과수원길/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라는 노래는 “아까시꽃이 활짝 폈네”라고 해야 맞는 거다. 아카시아꽃의 진한 꿀냄새는 어딘지 마음을 아련하게 후비는 맛이 있는데, 내가 알던 이름이 아니라고 하니 조금 배신감도 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까시나무가 해외에서 들여온 외국 수종이고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오해하여 2009년 대대적으로 벌목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0~70년대에는 황무지를 녹화한답시고 심었던 생명력 좋은 아까시나무가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들어 서울 산림 정비(서울시 ‘푸른도시국’)를 목적으로 잘려나갔다. 올해 때 이르게 핀 벚꽃 때문에 모두가 호들갑을 필 무렵, 은근슬쩍 달큰한 아까시꽃 향이 그리워진 것도 별일은 아니었던 거다.


작년에 <봉명주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하나 본 적 있다. 우리에게 재개발 소재로 가장 자주 이름이 팔린 ‘둔촌주공아파트’ 말고, 충북 청주에 프랑스식 공동주택을 참고해 만든 ‘봉명주공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봉명주공에는 조경이 끝내주게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독특하게도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쫓겨나는 사람이 아닌 뽑혀나가는 나무와 꽃들이다. 봉명주공단지 재개발이 확정된 뒤, 이곳에서 꼼짝없이 잘려나갈 운명이 돼 버린 수종을 채집하러 온 사람들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군가 어린아이 키만큼 큰 찔레를 캐며 말한다. “이거 이만큼 키우기가 쉽지 않은데.” 곧이어 인부들이 단지 어귀에 수령이 40년은 족히 돼보이는 버드나무를 썰어 넘어트리면서 영화 타이틀이 올라간다. “이만큼 키우기가 쉽지 않은데”라는 대사와 맥없이 풀썩 쓰러지고 마는 버드나무의 이미지가 중첩돼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그 인부들은 몰랐을 것이다. 재개발을 추진한 사람들도 몰랐을 것이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오랫동안 거기에 서 있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나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봐 왔을지. 이제 우리는 안다. 나무는 한 자리에 오래 있기 힘들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알싸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진한 꿀 냄새.



나는 나무가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 5살 무렵부터 16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기도의 어느 촌구석에 살았기 때문이다. 시골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구석진 마을’이었다. 주변에 온통 산과 들, 논밭과 개울뿐이었다. 그 때 그 마을엔 지금처럼 전원주택단지도 들어오기 전이었다. 우리 집엔 잔디밭이 깔린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을 둘러싸고 복숭아, 오디, 애기사과, 모과, 자두, 산수유 같은 나무들이 그득그득 심어져 있었다. 그 나무들에서 자란 열매를 먹으며 내가 자랐고, 나무에 올라 사진을 찍기도 많이 찍었고, 오래된 복숭아 나무는 나를 비롯한 삼남매의 그네 역할도 했다.(말이 그네지 그냥 늘어진 나뭇가지가 부러지랴 매달려 논 것뿐이다) 후에 그 나무는 너무 늙어 잘라버렸다. 아마 우리가 하도 매달려 가지가 곪은 탓도 있을 것이다. 마당에는 텃밭도 조그맣게 하나 있었고, 우리 삼남매 나무도 다른 종류로 하나씩, 총 세 그루 심겨 있었다. 어른들이 우리 이름을 따서 나무를 심은 건, 나무처럼 쑥쑥 자라라는 뜻과 자연을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 돼라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마당에 최근 들어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생겼다. 고등학생이 되어 ‘촌구석’의 면학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나 그 오래된 집을 아주 싼 가격에 세놓았다. 그랬더니 세입자가 우리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마당의 아주 오래된 주목 나무 하나를 잘라버린 것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직접 심은 나무라며, 싯가만큼 보증금에서 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는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어 결국 세입자에게 그 돈을 받아내지 못했고, 나는 못내 그 나무가 잘려나간 것이 분했다. 성인이 된 후로 그 집에 가 보진 않았어도 아주 가까운 사람이 손수 심어 20년을 자란 나무의 소중함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온 뒤 우리는 2년마다 집 같지 않은 집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0년을 한 곳에서 자랐다.


아까시나무의 수명은 40년 정도라고 한다. 2009년 서울시 ‘푸른도시국’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지금쯤이면 대부분 죽었을 게 뻔하다. 어떤 아까시나무는 진짜 이름도 알리지 못한 채 잘려나갔다. 이만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만큼 자라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일꼬. 머릿속에 곡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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