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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Jun 10. 2023

시드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사라져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일.

꽃피는 계절에 와인을 마신다. 와인을 마실 때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갓 딴 코르크의 안쪽에서 나는 냄새,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처음 와인을 따를 때만 나는 ‘똥똥똥’ 하는 공기와의 접촉음. 두 가지 다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그 찰나를 놓치면 즐길 수 없다. 어떤 와인은 첫 향과 끝 향, 입에 오래 머금었을 때 향이 다르고 또 음식과 마리아쥬 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향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꽃피는 계절에 와인을 마신다. 와인이 점점 줄어들고, 여러 꽃들이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버린다. 비가 와서, 철이 지나서, 사람들이 밟아서, 보살펴주지 않아서. 금방 시든다는 이유로 꽃을 오랫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꽃 선물이 가장 의미 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꽃을 선물한다는 건, 활짝 핀 꽃을 선물한다는 건, 그 찰나의 절정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꽃을 선물한다는 건, 주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활짝 피어 있고 가장 좋은 순간을 당신에게 주고 싶다는 의미다. 그 꽃을 보는 순간 나는 시들어버린 꽃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내가 아무리 애정을 퍼붓고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주고 물을 갈아주고 볕을 쬐어도(사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적도 없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꽃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말라간다. 처음 모습 그대로일 수 없는 선물이 왜 사랑의 선물이 되었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식어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은유인가?


내가 현실적으로 좋아하는 꽃은 실제 꽃이 아니라 꽃을 형상화한 것이다. 꽃무늬 드레스를 참 좋아한다. 꽃을 그린 그림도 무척 좋아한다.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던 시절에도 꽃 그리는 건 아마 좋아했을 것이다. 요즘에 꽂힌 작가는 365일 탄생화를 그려 전시를 한 적이 있다. 매일매일 피드에 그날의 탄생화를 그려 올린다. 한 철에만 피었다가 지는 꽃과, 억겁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접점이 있다는 게 반가워서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생일인 친구에게 오늘의 탄생화 게시물을 보내며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좋은 날 보내라고, 우리 행복하자고도 했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했던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찰.



정확히는 아름다움이 먼저냐, 선이 먼저냐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선한 성질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아름다움은 비싼 빈티지 가구, 명품 브랜드의 런웨이 컬렉션 같은 거였다. 냄새나고 오래되고 더러운 것들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함을 추구하려면 때로 가장 지독한 악취도 견뎌야 한다. 영화 <기생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함과 아름다움이 동일시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이 보편적일 수는 없는가?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을 가질 수는 없는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들도 많았다. 선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당시 나는 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전자가 아름다움에 지나치게 젖어있는 탐미주의라면, 후자는 정치적 올바름, 궁극의 선을 추구하는 운동권처럼 느껴졌다. 전자는 아무런 효용성이 없어 보였고, 후자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탐미하기엔 너무 폐허 같은 인간이고, 싸워내기엔 나약한 인간이다. 둘은 양립할 수 없는 데다가, 한쪽만 선택하기에는 내가 너무 우유부단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마도 내가 평생 동안 보고 느낀 모든 경험과 고민하던 바가 맞물린 결과로 번개처럼 순간에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이구나. 누군가 아주 오래 살았던 집에 들어가서 느끼는 멜랑콜리, 다치고 꼬질꼬질한 길고양이를 씻겨주는 일, 아주 오래되어 여기저기 스크래치와 빵꾸난 티셔츠를 보고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소유욕, 금방이라도 시들어버릴 듯 가장자리가 얄팍하게 말라가는 꽃을 보면서 생기는 안타까움,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공간에 내 시선이 머무를 때. 그 아름다움의 정의 안에서는 진, 선, 미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에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런 순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그 찰나를 소중히 느껴야 하는 것.


올 5월, 바로 옆집에 늘 그렇듯 빨간 장미와 분홍 장미가 순서 없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월말에 비가 오면서 후드득 떨어졌다. 활짝 펴 있을 때 ‘너무 아깝다, 너무 아깝다’ 생각하며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는데, 장미가 떨어진 흔적은 사진으로 찍어두지 않았다. 모든 사라져 가는 것은 아름답다 했던가? 그 아름다움은 온전히 그 순간에만 피어나는 것이므로.


꽃피는 계절에 와인을 마신다. 여름 햇살이 피워내는 아지랑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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