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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May 20. 2023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까?

내게 가장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건 광고뿐인 시대에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금사빠였고, 그걸 숨기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수업시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000은 제 꺼예요!”하고 소리쳤던 적도 있다. 최근 4년 간의 연애를 청산한 뒤, 새로운 사람들과 동시다발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던 친구가 말했다. “난 내 꺼를 만들고 싶은 것 같애.” 나도 그렇다. 한 번 내 꺼는 평생 내 꺼였으면 좋겠다. 한 번은 혼자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비틀거리며 돌아가던 길에 외로워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다. 연락이 닿은 남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헛개수를 두 개 든 채로 나를 맞았다. 고시원 만한 그의 집 베란다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헛개수를 마시며, 나는 습관적으로 점선을 따라 라벨을 뜯기 시작했다. 분명 점선이 있는데 잘 안 뜯겼다. 흐릿한 초점을 다잡아가며 다시 보아도 바알간 손톱 밑 살갗에, 뜯기지 않고 주욱 늘어진 라벨. “이거 점선 있어도 늘 잘 안 뜯어지지 않아요? 할 거면 제대로 하지, 사람들이 참 성의가 없어. 성의가.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성의가 없을 수 있죠?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죠? 좋아한다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진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어.” 나는 별안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연애는 늘 뒷전이었는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연애를 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다들 서로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연결해주고 싶어 했다. 연애는 캠퍼스 안의 로망이었고, 다들 그 로망에 충실하거나, 짐짓 모른 척하거나 했다. 나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입장을 취했고, 대학 친구에게 “넌 연애계의 유니세프니?”하는 소리마저 들을 정도로 ‘쓰레기(같은 사람들과의) 콜렉팅(=연애)’을 했다. 정말이지 연애를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스라이팅도 당하고, 맞고, 바람맞고, 지하철에서 혼자 울고, 돈도 뜯기고, 내가 때린 적도 있고, 잠수도 타 보고, 잠수 탄 사람을 기다려보고,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시나브로 위로를 받았던 순간도 있다.





대학시절이 끝나자 사람 만날 일이 줄었다. 연애 시장에서 도태돼가는 느낌이 들었다. 앱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나중에는 습관처럼 했다. 앱에서 매칭된 사람과 기대에 차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가 실망을 안은 채 ‘오늘 하루를 버렸다’ 생각하며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그저 그런데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곤 했다. 간 보는 사람과 몇 번 데이트를 한 뒤에 그만둘지 더 다가서야 할지 고민만 수도 없이 했다. “네가 와있는 곳은/너무 멀었어/I’m not gonna be the one to get hurt”(뉴진스, ‘Hurt’)라서였다. 그럼에도 넷플릭스처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스와이프 한 번으로 ‘고를’ 수 있는 그 앱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는 때로 내꺼처럼 사랑하려고 했다. 그 사랑이 이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대학생 때 은사님이 수업 시간에 말씀하셨었다. “근데 모든 사랑이 첫사랑 같지 않나요?” 한 번 확 빠져버리고 나면 머릿속에서 아이 이름까지 짓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좀 더 지켜보고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많은 걸 잃고도 다시 슬며시 마음의 빗장을 풀어 멍석을 촤르륵 깔아버리는 나와 달리, 칼춤을 춰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칼춤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계절이 바뀜을 느낄 때 제일 먼저 얘기해주고 싶은 사람, 나란히 누워 계절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됐는데.


내 우울함의 8할은 사랑의 실패였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밤이 다가올 때, 멀리서 “망개~ 떠억~~~~!” 소리가 들려오면 뛰쳐나가서 얼굴도 모르는 상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외로워졌다. 나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것은 ‘이 물건을 집에 들이십시오’하는 광고뿐이었다. 근대사회의 사랑은 종교라고 했던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은 나를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 줄 사람뿐이라는 생각. 그런 사람을 기다리면서 나는 사랑할 기회를 너무 많이 잃고 있었다. 사랑은 너무 좁디좁은 대상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이 되었다. 떼쓰는 아이에게 웃어주는 법, 지하철에서 연로한 자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 계절에 감사하는 것, 다친 길고양이를 보살펴주는 일 같은 작은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렸다. 작고, 불완전하고, 일시적이지만, 결국에는 지속가능한 다정함, 그것이 작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며칠 전 나는 몰래 울면서 기도를 했다. 집 옥상에서, “사고로 아프지 않게 죽여주세요”라고. 10년 만에 기도를 하니까 멋쩍어서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는 없는데요” 했다가 마지막엔 “이제 그만 죽을 만큼 사랑을 많이 베풀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가 되었다. ‘죽여주세요’가 ‘사랑을 베풀겠습니다’가 된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냥 죽음의 문턱에 오면 내 안의 사랑이 ‘나를 죽이지 말아요!’ 소리치는 것 같다. 무엇을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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