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엄마가 필요한 철없는 딸내미로 남을래.
엄마랑 나랑 만나면 꼭 하는 게 있다. 서로 꼭 끌어안고 몸을 이쪽저쪽으로 흔드는 행동이다. 우리는 이걸 ‘꼬물꼬물’이라 부른다. 엄마랑 같이 살 때는 이 인사를 거의 매일매일 수시로 했다. 그만큼 우리는 (주로 내가 갈구한) 스킨십이 많은 모녀다. 내가 엄마 젖을 가장 늦게까지 먹은 사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서로를 애틋하게 대하지만, 그렇다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을 만큼 친한 관계는 아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 속 엄마에게 “나를 좋아해? 사랑하는 건 알지만, 좋아하냐고”라고 묻는 딸의 복잡한 심경도 없고, 또 다른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처럼 서로를 피 튀기게 괴롭히는 긴장 관계도 아니다. 우리 사이의 첨예한 갈등 관계는 절대 수면 위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아마 엄마나 나나 성향이 속 깊은 대화를 회피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서로가 한 일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을 때, 서로를 예전처럼 대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 일들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마치 서로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은 각자 삭히기로 암암리에 합의한 것 같다.
스무 살에 집 베란다에서 주방용 앞치마와 위생모자, 그리고 본 적 없는 종류의 고무장갑이 널려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다. ‘우리 이대 나온 엄마가 급식실 아주머니로 전락했다’고 생각한 딸내미는 억장이 무너져라 울었다. 오빠와 내가 동시에 대학에 들어가자, 등록금에 대한 부담으로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 급식실에서 찜질 같은 증기를 견뎌가며 음식을 만들었고, 우리 집 다섯 식구의 세 끼니를 손수 차리면서 남의 집 살림을 병행한 적도 있고, 새벽같이 일어나 초등학교 등하교 스쿨버스에서 아이들을 인솔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급식실 아주머니, 아니 급식실의 노동자들이나 가사도우미 등이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덕분에 지금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머리 아닌 마음으로 와닿게 되었지만, 그 당시엔 늘 혼자 억울하고 신파적이었다. 엄마는 나뿐 아니라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에 대해 숨겼다. 나는 엄마가 나 때문에 자존심 죽이고 못할 일을 한다고 생각해 상상 속의 엄마를 더 헌신적이고 비참한 엄마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의 그 어머니가 바로 우리 엄마였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우리 엄마가 가련하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내가 엄마에게 효도하기 위해 더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도록, 그래서 나까지 가련한 인생으로 포장할 수 있도록.
많은 여성학자들이 분석해 왔듯, 나는 엄마와 나의 인생을 분리하는 데에 늘 실패하고 있다. 집을 나와서 ‘엄마 밥’을 먹지 않게 되자 나는 받아들이게 됐다. 엄마는 강박적이고 융통성이 없고, 자존심이 센 하나의 인격이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을 싫어하지만 잔정이 많고, 맡은 바는 끝까지 잘 해내야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이런 엄마와 나 자신이 어느 때는 너무 비슷해서 구분 짓기 힘들다. 엄마가 쇼핑하고 나서 생긴 포장지의 이런저런 스티커나 테이프를 온 집안에 붙여놓고 청소할 때마다 쓰는 걸 구차하다고 여겼던 나는 “제발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고 스팀 청소기를 사든지 해”라며 한탄했는데, 내가 혼자 살게 된 집 벽에도 언제부턴가 박스에서 뜯어낸 테이프와 다 쓴 화장품 용기에서 떼어낸 스티커가 가득하다. 나는 심지어 마스크까지 모아서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기는 당연히 사지 않았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텅 빈 집에 돌아와 이소라의 ‘고백’을 들으면서 엄마의 젊은 날을 생각한다. 엄마는 바에서 이런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와 진하게 키스를 나눈 적이 있을까? 거울을 볼 때 가끔, 내 얼굴 윤곽에 엄마 얼굴의 윤곽이 겹쳐진다. 나는 아빠를 닮은 줄 알았는데 점점 엄마도 닮아간다. 20대의 나는 엄마의 젊은 날을 대신 아름답게 살아내고 싶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가장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엄마를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의 아주 깊은 외로움이 엄마의 깊은 외로움을 부르는 것 같다. 부엌에서 가끔 혼자 밥을 먹게 될 때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집안일을 모두 끝내고 오후에 밥을 혼자 먹을 때가 많았다.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나는 부엌에서 혼자 쌀밥에 깍두기를 씹을 때마다 약간 울고 싶어졌다. 부엌에서 보낸 엄마의 긴 세월이 떠올라서. 엄마의 공간은 나의 공간이었다. 아마도 내가 삼 남매 중에 가장 밥을 느리게 먹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엄마의 부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엌에서 엄마와 보낸 시간 중에 소중한 기억이 많다. 그중에서도 어렸을 적, 집 앞에 핀 봉숭아 잎사귀를 뜯어 백반을 넣고 버무린 다음 내 손가락에 하나씩 정성스레 올리고 랩으로 감싸주던 엄마의 모습이 있다. 아마 할머니도 그렇게 엄마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주었을 것이다. 지금 사는 집 옥상의 작은 화단에도 봉숭아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여름이 되면 꽃을 틔우겠지. 다시금 마주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내 손 위에 봉숭아 반죽을 한가득 올려주는 엄마를 볼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