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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Jun 17. 2023

어떤 날씨를 좋아하십니까?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참 지랄 맞아… 날씨가.” 비를 한두 방울 맞으며 망원시장 쪽을 지나가던 참에, 어느 상인이 중얼거렸다. 요즘 날씨가 예전 같지 않다. 몇 년이나 살았다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여름비는 이렇지 않았다. 소낙비가 내리면 내렸지, 몇 방울 오다 말다, 오다 말다 하거나. 몇 주째 장맛비가 내렸으면 내렸지, 며칠 동안 소낙비만 내린다거나. 집 근처 제로웨이스트 샵에서는 최근 안 입는 티셔츠나 에코백을 가져오면 ‘날씨가 이상해’라고 실크 스크린 프린팅을 해줬었다. 올해만 해도 극심한 가뭄에 서울에서도 큰 산불이 났고, 재작년에는 비수도권에 엄청난 수해가 있었고, 해외에선 기록적인 폭염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다. 그저 날씨가 이상하다고만 하기에는 좀처럼 수상한 게 아니다. 기후가 변하고 있다. 기후가 변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날씨에 대한 낭만을 이야기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등학생 때 기욤 뮈소의 타입 슬립 로맨스 장편소설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입시생이었던 나 역시 길티 플레저처럼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그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기욤 뮈소의 책에는 새로운 장이 시작할 때마다 인용구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길티 플레저로 기억하는 인용구는 장 가뱅이라는 사람의 말이다. “누군가 날 사랑해 주는 날, 날씨가 정말 좋아! 난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모른다네. 날씨가 정말 좋아!” 장 가뱅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아서 그가 시인인지 가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도 인터넷 검색창에 ‘기욤 뮈소 장 가뱅’을 검색하면 이 문구가 주르륵 뜬다. 좁은 의미의 ‘사랑’이 주는 행복감, 유포리아의 순간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날씨가 참 좋네요”라는 의례적인 인사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같은 고백 사이에는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계곡만큼 깊은 차이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태풍이 몰아쳐 우산이 뒤집어져도 까르륵 웃을 수 있음, 폭우에 속옷까지 다 젖어도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음, 땡볕에 머리가 어질 해도 그저 취한 듯 미소가 가시지 않음, 폭설이 와서 문을 열 수가 없을 지경이 돼도 온몸에 기운이 가득 차서 눈을 파내고 기꺼이 밖으로 나가 설국 위에 드러눕고 싶음, 한파로 손과 귀에 감각이 없어도 어깨를 바짝 붙이고 어디까지 든 걸어가고 싶음.



쏟아지는 볕이 아까워서, 쏟아지는 마음을 다 맞아낼 수 없어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로맨틱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흘레붙기 좋은 계절? 여름밤이 되면 젊음을 맘껏 낭비하며 사랑하고 싶어진다. 끈적이는 살결도 좋고, 약간의 땀냄새에서 느껴지는 그 사람의 체취도 좋고, 무엇보다 새벽까지 걸어 다녀도 무리 없는 이 날씨가 너무 좋다. 따스한 날씨는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게으르게 일하고, 아주 바쁘게 사랑하고 싶다. 비가 내리면 더 좋다.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5개월 동안, 절반 이상은 비가 내렸다.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카트리나 앤 선샤인의 노래 ‘Walking on Sunshine’은 지금도 우중충한 날씨면 한 번씩 꺼내 듣는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이 전과 막걸리를 찾듯, 나는 비만 내리면 햄버거를 찾곤 했다. 그러니까 나만의 노스탤지어를 맘껏 즐기고 싶은 날씨는 비 내리는 날씨. 여름 장맛비는 더 좋다. 한없이 폭우가 내리는 동안 한없이 마음이 쏟아져내린다. 어딘가에 꼭 둘이 꼼짝없이 갇혀서 서로의 몸을 물고 빨고.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마음이 제자리걸음을 한다. 서로의 몸 안에서, 마음 안에서, 기억 안에서. 여름 안에서 나는 사랑을 낭비하고 싶어진다.


지난 5월말 뮤직 페스티벌에 갔을 때 종일 비가 내렸다. 검은 우비를 입고 질척이는 땅을 걷는 게 좋았던 건 그 날씨를 오히려 즐기는 일행들 덕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은 “비 오는 날엔 냄새 나서 클럽 가기 싫다”라고 말했었는데,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는 비가 오면 오롯이 비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 빗사이로 보이는 영롱한 소나무 가지, 온통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들. 12월에 방콕에 갔을 땐 종일 숨통을 조이는 듯한 뜨거운 날씨가 좋았다. 추위에 약한 내가 밤낮이고 활달해질 수 있는 날씨가 좋았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녔다. 나시를 마음껏 입을 수 있어서 또 좋았다. 나시를 입었을 때 내가 제일 예쁘거든. 또 다른 12월에 타이베이에 갔을 땐 온통 비가 내려 우울했다. 정확히는 내가 생각한 여름 날씨를 즐길 수 없어 우울했다. 타이중으로 금방 넘어갔다. 그곳은 날씨가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그 수많은 여름밤들처럼. 여름밤이 되면 나는 또 사랑을 시작하게 되려나?


당신이 어느 계절을 좋아하는지,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오늘 날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으레 하는 인사를 가장하여 묻고 싶다. 당신은 어때요? 오늘 날씨 어때요? 내가 사랑하는 날씨를 당신도 사랑하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이 날씨가 좋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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