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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Jul 29. 2024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더이상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을 때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심하게 온 시기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지우고 ‘살고 싶지 않다‘고 쓴다.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는 나에게 ‘자살’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게 느껴지고, 좀 무서운가 보다.


내가 그간 느낀 것이 자살 충동은 맞지만, 막상 글자로 대하니 자살보단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다기보다, 그저 내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한참 남편과의 사별 후 생각보다 너무 잘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비정상인지 한편으론 다행인 건지, 아니면 아직 큰 폭풍이 오지 않아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예고 없이 커다란 우울이 들이닥쳤는데, 아마도 동생의 결혼 언저리쯤부터 서서히 진행되었던 것 같다. 이제 진짜 혼자라는 자각. 나 혼자 주어진 삶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 우주에 떠도는 먼지처럼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그 짙은 외로움이 매일 밤을 견딜 수 없게 했다. 나는 이 어둠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울고, 한편으론 내일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또 울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려운데, 밤을 막을 길이 없었다. 마치 내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처럼.
매일밤 나는 그렇게 어둠 앞에 무력해졌다.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은 그런 시간에 찾아왔다. 삶을 지속하지 않기 위한 구체적인 장면들을 상상하다가, 나는 어찌어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기 쌔근쌔근 자고 있는 내 새끼는 어쩌라고. 새끼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또 운다.


사람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큰 어려움을 겪었거나 힘든 일을 만났을 때도 물론 그렇겠지만, 무의미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적어도 내 경험으론...


더이상 이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을 때,

타인이 부여한 의미 말고 나 자신이 내면에서 길어 올릴 삶의 의미가 바닥났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내 삶의 의미를 물어야 했다. 그를 먼저 데려가시고, 나를 남겨두신 이유를.


여전히 내 삶은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루하루 이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의 그 처절한 몸짓이,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두운 밤을 지날 힘을 준다는 것. 


내가 더 사랑해야 할 존재들을 떠올려 본다.

나로 인해 웃게 될 존재들을 떠올려 본다.


그분이 주신 마음대로, 그리고 내가 믿는 대로

정말 삶이 곧 사랑이라면...

내 삶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내 주변에

아직 사랑을 쏟아부어야 할 대상이 남아있다는 것.

나로 인해 회복될 존재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이런 마음의 조각들이 그 어두운 밤을, 힘겹지만 조금씩 버티게 하고 아침이 오면 눈을 뜨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못 살 것 같은데, 어찌어찌 살아지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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