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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Sep 26. 2023

전쟁터에서 평화를 외치다.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





함께 운전 연습을 하며 남편은 빨리 내가 운전에 능숙해지길 바랐다. 남편에게는 ‘이쯤이면’과 ‘이만하게’가 있었다. 그것은 남편의 기준이었다.



운전 연수 이후 ‘이쯤이면’ (한 삼 개월쯤) 지나면 ‘이만하게’ (인근 시내까지는 혼자 운전할 수 있다)고 남편은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운전 연수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 주말에 남편과 운전 연습을 했다. 그 기간 동안 말 그대로 남편은 사자가 야생에서 새끼 사자를 훈련시키듯 강하게 나를 훈련시키려 했다. 사자는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려 살아남는 새끼만 기른다고 하는 말이 있지 않나! 그처럼 일단 무조건 하든 못하든 도로 위에서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다나.

마치 사자에 빙의라도 한 듯 남편은 여기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므로 운전을 잘하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도로 위는 전쟁터라고 하며 그래서 운전을 하면 사람이 거칠어지는데 원래 그게 정상이니 놀랄 것도 아니라고도 했다.

 


나는 내가 운전연습을 시작한 건지, 아니면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참전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 남편말대로 상상해 보았다. 여기는 전쟁터라고. 그건 맞는 것 같다. 도로 위의 차들이 총알과도 같이 빠르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덜컥 겁이 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어리바리한 신병이다.



아니 근데, 애초에 내가 전쟁에 왜 참전해야 하지? 나는 평화주의자란 말이다. 




그동안 나의 세계는 이를테면 여성스러움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남녀 차별적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여성스러운 세계에서 배려와 양보를 아끼지 않으며 온화하게 살아오고 있었을 뿐이다. 딱히 경쟁을 회피한 적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등수의 경쟁과 같은 것에서만 조용히 다퉈왔지 대놓고 다퉈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나는 제대로 싸우는 법을 잘 몰랐다. 싸우는 법을 모르는데 전쟁에는 어떻게 나가냔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약함’이라고 말하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세계는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제 강하고 거칠어져야 한다고? 그런데 그게 어떻게 하는 거지? 비폭력주의자는 군대도 안 간다고 선언하고 그러지 않나. 근데 그럴 때 감옥에 가는 것 같았는데... 또 생각해 보니까 야생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 새끼 사자도 그대로 도태되어 버리잖아? (죽는다는 말이다) 그럼 강해지지 못하는 초보 운전자는 어떻게 될까? 심히 걱정이 된다.



이곳은 어쩐지 강한 남자들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곳은 나한테 맞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운전을 함에 있어 배경지식이 중요함은 이미 앞에서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흔히 우리가 "감을 가져봐.", "감대로 해."라고 말할 때 그 '감'은 '배경지식의 영역'이다.  


관련된 얘기로, 우리 아들은 한두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동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서너 살 때부터는 자동차 도로 매트 위에 미니카들을 주차시키는 놀이를 즐겼으며, 자동차들이 꽝 하고 충돌하면 까르륵 즐거워하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본인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장난감 자동차도 좋아했다.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집 안 물건들을 장해물 삼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거침없이 경적을 울리기도 하곤 했다. 빵빵! 비켜나세요!

어쩌면 아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놀이를 통해 운전을 학습했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들을 쾅쾅! 충돌시키며 도로 위는 전쟁터라는 것을 이미 깨달아 일찍부터 정서적으로도 단련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우리 아들은 어쩌면 엄마보다 수월하게 그 '감'을 가지고 운전이라는 세계에 좀 더 친숙하게 진입하여 쭉쭉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미니카를 가지고 놀아본 역사가  없는 나는, 지금 내 첫차가 미니카나 다름없다. 그러나 미니카랑 다르게 실제로 차들이 쾅쾅 부딪치면 그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이곳은 정말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이다.  모든 새로운 일은 대게 모르는 일일터이지만, 그래도 그 생경함에도 다른 결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에도 나한테 잘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있을 테고. 나는 운전에 결이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잘 모르는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이 상황이 더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운전에 결이 다른 남자들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운전에 결이 맞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튼 이것이 성향의 문제라면, 그 성향에는 죄가 없지 않나?



그러나 결국 내가 적응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내가 맞춰나가야 할 것이고, 나아가 지금까지의 내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꿔나가야 맞는 건지도. 일단, 그러려면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



그러나 당장 내일부터 강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강해져 보기로 했다.



덧. 사자가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려 살아남는 새끼만 기른다는 설은 사실 잘못된 얘기라고 한다. 어미 사자는 새끼사자를 정성스레 돌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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