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에서 연극영화과 담임으로 근무했을 때,
우리반 반장이었던 K에게 전화가 왔다.
"쌤, 저 코로나 확진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K의 말에
"잘 지내고 있었지?
바쁘게 살다가 격리하느라 한숨 돌릴 틈 생겨서
전화했구나? 연락 줘서 고마워."
반갑게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2학년 모습이 대부분인데,
K도 벌써 26살 청년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치른 첫 입시에서 합격하지 못한 K는,
재수를 하고 삼수를 했다.
종종 연락을 해오는 K를 만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밥을 사는 것뿐이었다.
재수를 시작했을 때, K는 말했다.
“후반부에 연기학원 가긴 할 텐데요..
일단 아르바이트하면서 돈 모으고 있어요.
쌤, 요새 고전작품 읽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 연기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고
저한테 하신 말이 뭔지 조금 알겠어요.”
나의 배낭을 빌려서 유럽여행을 다녀온 K는
마리오네트 인형을 선물로 건네며 이야기했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보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은 여전한데,
대학은 꼭 연극영화과를 가야 하나 고민이 돼요.
요새는 철학과도 부쩍 관심이 생겨요.”
“나는 두 학과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안 들어.
첼리스트 장한나도 음악이 아닌 다른 전공으로 진학했던 것 같아.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여러 선택지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너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 같아.
쌤은 네 진정성이면 철학과든 연영과든
합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K는 결국 연영과 대학생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2개 뛰면서 수업 듣고 있었는데,
코로나 걸려서 격리 중이에요.
연기도 좋고, 대학 와서 만난 선생님들도 너무 좋아요.
이번엔 연출도 하게 되었어요.
대학원 진학도 하고 싶은데, 이것저것 고민이 되네요.”
“K야, 일단은 네가 배우고 싶으면 도전해봐.
네가 ‘배우 하고 싶네…’하면서 겉멋 든 사람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생활력도 있는 사람이니까 걱정 안 돼.
교수가 되어야 한다든가, 유명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리고
지금처럼 재미있게 열심히 하면, 네가 잃을 건 없지 않을까?
쌤은 네가 지금 같은 자세로 삶을 산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 없이 잘 살아갈 거라 믿어.”
“옙. 역시 쌤은 좋은 멘토예요.”
아이는 내가 좋은 멘토라고 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며
이미 자신의 삶에서 주연으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는 K는
나의 어린 스승이다.
K가 전하는 긍정적 에너지가
나에게 힘을 주고, 자존감까지 올려준다.
영화관 크레디트 자막에서 K의 이름을 보는 날,
유명 시상식에서 K가 트로피 받는 날을 꿈꾼다.
그러나
이런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지혜는
K가 꼭 챙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