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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Oct 21. 2022

소중한 사람과 함께 꽃을

Lesson 2


내가 가장 힘들던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이모가 환갑을 맞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한 번도 온전한 수험생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작은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거나 과외를 했다.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쓴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 그러면서도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등록을 할 때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소속감이 필요해서 들어간 석사과정은 논문도 쓰지 못한 채 수료 상태로 마쳤다.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공부라도 실컷 했을 텐데, 조교일이 바빠 논문도 제대로 못 쓴다는 말로 부모님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저 무엇이든 핑계거리가 필요하던 시절이었고, 항상 실패에 대한 이유를 미리 준비해 놓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확신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어 한없이 불안하던 때였다.

 

그런 나에게 이모가 500만 원을 주며 말했다.

“나는 네가 항상 마음 졸이고, 결과에 연연하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이모한테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이 돈이 너에게 마음의 여유를 줬으면 좋겠다. 뭐가 됐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 시험에 떨어졌다고 실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싶으면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이 돈을 쓰면서 온전히 시험에만 집중해 봐.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꼭 공부하는 데 쓸 필요도 없어. 여행을 하든, 운동을 하든, 너를 온전히 즐겁게 하는 일에 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제 네 돈이야.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써. 갚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면 네가 더 부담을 가질 것 같으니까 나중에 이모가 할머니 되면 줘.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또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이 500만 원을 통해 배웠으면 좋겠다.”

 

이모가 부쳐 준 목돈 ‘5,000,000’이 찍힌 통장을 들고 눈물을 쏟았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돈을 들고 노량진 학원에 가지도 못했고, 여행을 다녀오지도 못했다. 내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소하게 돈을 벌었고, 가끔씩 돈이 부족할 때면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대신 이모가 준 돈을 썼다. 그리고 다시 돈이 생기면 500만 원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줄어들고, 누군가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같아 든든했다.

 

이모에게 500만 원을 받고나서 얼마 후, 해외아동후원을 시작했다. 큰돈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겐 든든한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를 지원한 금액이 500만 원을 넘었을 때, 이모에게 얘기했더니

“나 할머니 돼도 너한테 500만 원 받을 생각 말아야겠다. 넌 이미 돈을 다 갚았네.”

하고 말했다.

이모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를 베푸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줬다. 임용고사를 합격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만족하며 감사한 삶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이모가 베풀어 준 것들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아집으로 힘들어하던 나를 넓은 세상으로 안내했던 이모의 세상이 오히려 조금씩 좁아지려는 것 같다. 원래도 길치였던 이모는 운전을 점점 부담스러워했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IT세상에 적응하느라 종종 버벅거렸다. 얼마 전, 10년 이상을 뒷바라지하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이모의 삶이 더욱 느슨해졌다. 이런 이모에게 예쁜 꽃바구니 대신, 기분 좋은 자극을 선물하고 싶어서 연락했다.


 - 이모, 꽃 좋아하잖아? 시간 괜찮으면 나랑 같이 꽃꽂이 배우러 갈래?

 - 그래, 가자.

 - 혹시 좋아하는 꽃 색깔 톤이 있어?

 - 핑크, 보라, 파스텔톤이 좋아.

 

처음이라 기대가 되면서도 뭘 배우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떨린다는 이모에게 말했다. 우리는 전문가도 아닌데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며칠 후, 스튜디오에 들어선 이모는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어머, 무슨 꽃들이 이렇게 예쁘니..”

“이모님께서 핑크, 보라, 파스텔톤 꽃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준비했어요. 여기 분홍빛 꽃은 카네이션과 작약이고 옆에 있는 보랏빛 꽃들은 오번가장미, 이베리스, 스톡이에요. 스톡은 비단향꽃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요. 이 친구들과 어울릴 만한 파스텔톤 꽃은 아이두장미와 라넌큘러스고, 소재는 다루기 쉽고 무난한 레몬트리로 준비했어요.”

 

물통에 있는 꽃만 보고도 좋아하는 모습, 텅 빈 플로랄폼을 앞에 두고 당황하는 모습, 스승님의 안내에 따라 완성된 바구니를 안고 행복해하는 이모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도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정신이 없어. 내 바구니에 집중하느라 이모 바구니를 볼 겨를이 없었어. 그래도 이모 마음이 어떤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아. 쉽지는 않은데, 너무 재미있고 행복하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응.”

대답한 이모는 부끄러워하며 바구니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모는 집에 가서

 - 미카엘라야! 오늘 덕분에 행복한 하루였다.

   온전한 나의 하루였던 것 같아 좀 특별한 감정이다.

   고마워. 고생했어. 잘 자~

문자를 보내왔다. 이모의 카톡 프로필사진이 꽃바구니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후로도 이모의 프로필사진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이모는 그날의 특별한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했다.


꽃을 배우면,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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