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haela Oct 22. 2022

여왕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Lesson 4


스튜디오에 들어가 스승님께 인사를 하고 말했다.

“작약이 눈에 띄어요.”

“작약은 많은 플로리스트들이 좋아하는 꽃이에요. 작업을 할 때 존재감이 크거든요. 작약을 대체할 수 있는 꽃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가격도 비싸면서 꽃은 오래가지 않아 봄 한철을 제외하고는 쓰기가 부담스러워요. 수입도 잘 되지 않는 작약이 이 시기가 지나면 한 송이에 4~5만원씩 하거든요. 작약으로 만든 부케는 5월 신부의 특권이죠.”


“작약은 평소에 좋아하던 꽃이 아니에요. 꽃이 커서 부담스럽고, 북한 행사에서 환호하며 흔들어대는 꽃 같아 촌스럽게 생각됐거든요.”

“어쩐지.. 지난 레슨 때, 언니가 유독 달리아를 예뻐하고 작약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 안 하더라고요.”

“예. 그런데, 지난주에 스파이럴 연습하고 바구니 만들어 갔잖아요? 바구니에서 유독 탐스럽게 활짝 핀 작약 한 송이를 보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어떤 책에서‘만개한 작약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압도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는 문장을 읽었는데, 저도 그랬어요.”


“지난주에는 우리가 분홍색 작약을 썼잖아요? 오늘은 레드참이라고 불리는 빨간색 작약을 준비했어요. 와인빛이 도는데 색깔이 참 강렬하죠?”

“눈으로 보는 질감이 매우 고급스러워요. 광택 나는 잎이 실크 원단 같아요.”


“이 친구도 작약이에요. 코랄작약.”

“색깔이 너무 고와요. 이런 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코랄 작약은 꽃이 활짝 피었다가 색깔이 점점 빠져서 하얀색으로 변해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거예요.”

“이 고운 색이 흰색으로 변한다니.. 상상이 안 돼요. 잘 봐야겠어요.”


“다른 꽃들도 소개할게요. 장미는 콜롬비아에서 수입한 말리부장미고, 지난주에는 노란색으로 썼던 모카라를 이번 주에는 다른 꽃들과 어울리게 핫핑크 색깔로 준비했어요. 여리여리한 연보라색 꽃이 스카비오사, 자줏빛 도는 작은 꽃은 과꽃, 동물의 꼬리처럼 생긴 소재는 트리플융이에요. 아스틸베는 우리나라에서 노루오줌이라고 불려요. 뿌리에서 노루오줌 냄새가 난데요. 오늘 비주얼과 안 어울리게 이름들이 좀 그러네요. 이 그린소재 이름이 쥐똥나무거든요. 열매가 쥐똥을 닮아서 그렇게 부르는데, 청지땅나무라고도 해요. 지난주에 배운 스파이럴 연습을 두 번 하고, 잠깐 쉰 뒤에 바구니 만들게요.”


꽃들이 너무 예뻐서, 내가 손을 대면 더 미워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웃라인 잡는 감각이 지난번보다 나아졌는데요.. 주어진 꽃의 양을 보고, 전체 바구니 크기가 얼마나 되어야 할지도 가늠해 봐요. 구성과 디테일에 너무 집중해서 빈 곳이 안 메워지고 있어요.”

스승님의 피드백과 도움을 받으며 바구니를 완성해 집에 왔다.

 

초보자의 손에 시달리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했던 꽃들이 시간의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나를 압도했던 작약은 꽃잎을 한 번에 후두둑 떨구고 져버렸다.

작약이 시들던 날, 어찌나 섭섭한 마음이 들던지.. 김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몇 백번을 본 시였다. 1930년대 순수시, 역설법..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달달 외우면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서운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했다.


나태주 시인이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말했는데, 풀꽃만 자세히 보아야 예쁜 건 아니다. 여왕에 비유되는 작약도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무심히 넘긴 것들 중에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세상 모든 것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없을지라도, 더 많은 꽃들을 자세히 볼 수는 있겠지. 앞으로 꽃들을 자세히 보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마주할까 싶어 설렌다. 내게 봄이, 5월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 작약과 모란은 매우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 서양에서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Peony'라 부른다. 모란꽃은 나무에서 피고 지며, 겨울이 되면 나무만 남게 된다. 작약은 풀이라서 겨울이 되면 죽어 땅으로 되돌아갔다가 봄에 다시 피는데, 꽃에서 윤기가 난다.

이전 04화 마법 같은 손길의 비결은 스파이럴 기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