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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Jan 19. 2017

세상을 좀 오해하면서 살려고 해.

2016년의 끝자락은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으며 보냈어. 2017년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며 시작했고.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같은 사람이니, 결국 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지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한 거지.     


두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어. '특별판 3천부 한정 판매'라는 문구와 간결한 디자인이 마음을 끌었거든. 다른 작가의 책을 굳이 같은 디자인으로 내놓은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 인물이더라.      


이미 1956년에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로맹 가리는 1975년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다시 공쿠르 상을 받았어. 한 작가에게 평생 한 번만 준다는 공쿠르 상을 두 번 씩이나 받은 유일한 작가가 된거야.   


로맹 가리의 책상에서 굴러다니는 원고를 보고 '노엘'이라는 사람이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을 때, 어떤 사람은 로맹 가리는 이미 끝난 작가라고 말할 정도였어. 기존 문단은 고정관념을 갖고 로맹 가리의 작품을 대한거지.

기존의 관념이 지배하는 쉽고 단순한 분석으로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에서 로맹 가리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는 작가가 공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하면서, 편견으로 가득 찬 문단을 한 방 먹인 게 통쾌했어.      


처음에는 책의 내용보다도 '두 번 공쿠르 상 수상, 24살이나 어린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사랑, 권총 자살'이라는 작가의 이력에 더욱 관심이 갔어. 이런 사람이 쓴 글은 어떨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16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먼저 펼쳤다.     


역시나 씁쓸하더구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는 페루 해변에서 홀로 카페를 운영하는 ‘그’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그녀’를 구해줘.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행동하던 그녀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일 거라고 생각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희망(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그는 그녀가 방에서 쉴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고, 그러다가 성폭행의 흔적을 지우고 싶다며 간절히 그를 원하던 그녀와 사랑을 나눠... 그런데 그녀를 찾아온 ‘남편’에 의해 그녀가 불감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떠난다. 아무도 없는 카페는 다시 적막해지지.     


「어떤 휴머니스트」에는 인간성을 믿는 ‘뢰비’라는 유태인이 나와. 뢰비는 장난감 공장 사장이었는데,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뮌헨 출신 하인(슈츠) 부부에게 재산을 매각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지하 은신처에서 살게 돼. 현실과 접촉을 거부한 채 하인 부부에게 바깥세상의 소식을 듣고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뢰비는 끝까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아. 세상에서 관용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기다리지... 그런데 히틀러가 몰락하고 뢰비의 친구가 찾아와 그의 안부를 물었을 때, 하인 부부는 뢰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뢰비는 히틀러가 몰락한 후에도 계속 지하의 은신처에서 살아가. 인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하인 부부를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이 밖에도 「벽」에는 비소를 먹고 고독하게 죽어가는 옆방 여자의 신음소리를 감창소리로 오해한 청년이 고독과 절망감(때때로 층계에서 마주치 옆방 여자가 청년의 눈에는 ‘천사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였거든) 속에서 목을 매 죽는 이야기가 나오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수용소에서 자신을 학대하던 나치 친위대원에게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매일 저녁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남자가 나와.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다그쳐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나치 친위대원)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     


타인의 희망어린 호의를 기만으로 짓밟는 사람들과 치졸하고 어리석은 인물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책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환멸과 혐오가 이 작가를 자살로 몰고 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앞의 생』을 읽고는 생각이 달라졌어.

열네 살짜리 소년 모모(모하메드)는 창녀 출신 보모인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 모모를 로자 아줌마에게 맡긴 모모의 아버지는 창녀인 부인을 죽여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십일 년 동안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거야. 부모가 없는 다른 아이들은 입양 보냈지만, 모모 앞으로 매월 오던 양육비가 끊긴 이후에도 로자 아줌마는 모모와 함께 살았어. 로자 아줌마는, 세상에 도통한 어른처럼 말하며 강한 척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모모를 사랑하고 의지한거지. 모모도  머리가 다 빠지고 뚱뚱해서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힘든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어. 치매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로자 아줌마지만, 그녀 없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게 두려운 모모 역시 아줌마를 의지했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내.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로자 아줌마는 신산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모모의 손을 꼭 잡아줘. 모모는 병원의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그녀가 지하실에서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고, 죽은 그녀의 시체 옆에서 삼 주일을 지내.


이웃집에 사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문학, 종교, 사랑 등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에 대해 전해줘.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뭐가 되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롤라 아줌마는 숲에서 동성연애자들을 상대로 번 돈으로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 먹을 것을 사 나르고, 아프리카에서 온 왈룸바 씨 일행은 의식이 없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그들 방식으로 푸닥거리를 해 주고, 이삿짐을 운반하는 자움 씨네 형제들은 육중한 로자 아줌마를 옮겨 강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해 줘. 그리고 우연히 몇 번 만난 모모에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넸던 나딘 아줌마는 죽은 로자 아줌마 곁에서 발견된 모모를 자신의 시골 별장으로 데려간다.     


결국 66살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는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로 작품을 끝마쳐.

사랑해야 한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마지막.


그런데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가 왜 자살을 택했을까?

생전에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의 사에에서 낳은 아들 ‘디에고’를 매우 사랑했단다. 디에고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 판단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거 말했어.

이혼한 후 약물 과다 투여로 생을 마감한 진 세버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어른이 되자,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로맹 가리의 삶을 보고 생각했어. 그가 자살한 건, 자신이 더 이상 사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할 대상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로맹 가리는 자신의 죽음이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게 내 멋대로 생각하며 그의 책을 더 읽어볼 참이야. 로맹 가리의 책을 두 권밖에 읽지 않은 내가 얼마나 많은 오독을 하고 있을까? 예전의 나라면 오독이 두려워서 이런 글은 쓸 엄두도 내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두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13쪽.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 들으셨나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303-304쪽.


처음에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트렸던 모모는 나중에 노쇠해서 말귀도 못 알아듣는 할아버지께 말해. 하밀 할어버지가,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반대로 기억하는 모모처럼, 비관적인 세상을 좀 오해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맹 가리의 책을 좀 오독하면서 내 앞의 생을 살아 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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