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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물멍을 하며 두더지 잡기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나 혼자 피크닉이라니… 오 마이갓. 이게 실화냐…

돗자리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향해 누워도 보고 그러다 금세 주변이 의식되어 다시 일어나 두리번거리면서도 나는 즐거웠다. 하늘과 물색을 닮은 나의 커다란 돗자리. 마침내 혼자서 피크닉을 해보았다! 해보고 싶었던 것을 이룬 순간이란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성취감과 뿌듯함이 차올랐다.


사소한 경험일 뿐인데 쫄보인 나는 돗자리 펴고 앉아 인생에 큰 자신감이라도 얻은 것처럼 희망을 느끼고 만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찰나의 이 감정은 순식간에 손 안의 모래알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걸. 하지만 감정은 사라져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주변과 동화되어 가며 서서히 경계를 풀고 물멍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상념들이 내 안에 밀려왔다 흩어져갔다. 그것들은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어떤 맥락도 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왔고 타이밍이 맞는 것들만 내 머릿속에 잡혔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오래전에 공무원 준비를 (하는 척)하며 지낼 때 서울시청에서 인턴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나는 몰랐던 정보였고 아빠가 어디서 보고 와서는 가산점을 준다고 지원해 보라고 했다.

나는 당시 사막 같은 연애를 끝내고 공허한 마음으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 공무원 준비는 그저 대외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공부는 거의(=아예)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다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냥 아빠가 시키는 대로 인턴 모집에 지원을 했고 새해 새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시청 인턴 사업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었을까? 모르지만 인턴이 하는 일은 그냥 9시에 출근해서 공무원들이 시키는 간단한 보조업무를 하다가 5시 50분부터 슬금슬금 퇴근준비를 하고 6시가 되면 가차 없이 퇴근하는 일이었다. 우리한테 시키는 일이라곤 서류 같은 걸 본관에서 신관으로 혹은 신관에서 본관으로 전달하는 배달업무이거나 간단한 입력작업, 전화 업무 같은 머리는 쓸 필요도 없는 쉬운 일들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다른 형태의 일자리로 그 일들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었기에 인턴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인턴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집에서 시청까지 출퇴근을 하는 그 자체였다. 왕복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출퇴근 길을 붐비는 마을버스와 지하철에서 시달리다 보면 출근과 동시에 방전이 되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리 멀다고 해도 왜 그렇게 지쳤을까 싶기도 한데(이후 비슷하게 소요되는 회사생활을 할 때에는 멀쩡히 잘 다녔었다.) 당시에 나는 그만큼 심신이 무기력했던 것 같다. 하는 일도 없는데 피로는 쌓여서 나는 점심도 먹지 않고 수면실에서 낮잠을 잤고 얼마 후 한의원에서 실제로 과로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엄마는 처음으로 나에게 녹용이 들어간 한약을 지어줬지만 나는 여전히 골골대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다 보니 다시 봄이 되었고 찬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녹음이 짙어져 갈 무렵에는 과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 내게 힘이 되어준 것들은 동기들과 나누는 하찮은 농담들과 거의 매일 사 먹었던 생과일(키위) 주스, 종종 퇴근길에 걷던 청계천 산책같이 사소한 것들이었다. 순간의 작은 즐거움과 기쁨들이 모여 내 우울을 거둬갔다.

사소한 것들이 일상에서 반복될 때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아무튼, 눈치 보는+쫄보는 이렇게 혼자 피크닉을 하는 것 정도도 일생일대의 큰 도전인 것처럼 대하며 산다. 작은 것에도 많은 생각과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하기에 상당히 피곤하지만 동시에 작은 것에서도 큰 기쁨과 용기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나를 행동으로 이끌어 준 모래바닥에 발라당 자빠져있던(그의 자유로운 모습을 추앙하는 표현이다), 자기도 모르게 선업을 짓고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리 계획했던 피크닉이 아니었기에 준비한 것도 없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었으나 이날의 피크닉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스로를 믿는 순간,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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