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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형 돗자리와 우연한 용기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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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한낮의 바다를 좋아한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하얀 구름과 반짝이는 윤슬.

잔잔한 바다보다는 파도가 일렁이는 역동적인 바다를 참 좋아한다.


남들 신경 쓰느라 집중이 잘 안 된다면서도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한참을 카페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카페 바로 앞 강문해변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산책을 하며 바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몇몇은 돗자리나 캠핑용 의자를 펴놓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나도 피크닉을 하고 싶어졌다. 


피크닉은 나의 로망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스타에서 보는 사진들 같이 막 유럽풍으로 바게트가 피크닉 가방에 꽂혀 있고 와인잔과 과일들이 준비되어 있고, 레이스나 체크무늬 면돗자리 위에 무심히 던져져 있는 들꽃다발... 그런 것까지는 딱히 바라지 않는다.

귀차니즘 덕에 자연스럽게 극강의 실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내게는 그저 엉덩이가 배기지 않고 방수가 잘 되는 돗자리와 작은 피크닉테이블, 그리고 무릎담요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

다만 유독 욕심을 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돗자리의 크기인데, 나는 둘이 누워서도 머리나 발이 삐져나가지 않고 편안하게 뒹굴 수 있을 정도로 큰 돗자리를 좋아한다. 몸을 뉘일 수도 없는 비좁은 돗자리는 영 불편해서 피크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주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 각자의 돗자리 면적에 맞춰 옹기종기 앉아 김밥과 떡볶이를 먹고 있지만 눈앞의 풍경은 우리 모두가 각각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점이다. 모두에게 오롯이 주어지는 이러한 풍요와 자유를 나는 얼마나 누리며 살고 있을까? 


 




성격과 취향은 종종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갈등의 원인이 된다. 거기에 어떤 상황까지 더해지면 시너지가 나기도 한다.

혼자서 피크닉을 한다는 것은 쫄보에게는 상당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나는 돗자리를 꺼낼까 말까 또다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며 해변가를 어슬렁어슬렁 거닐었다. 꼬막비빔밥의 산을 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금 찾아온 고뇌의 시간. 


큰 개를 데리고 온 젊은 남녀는 모래사장에 캠핑의자 두 개를 바다를 향해 깊숙이 꽂아놓고 앉아 편안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카메라 삼각대가 길쭉하게 세팅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해변에는 은박 돗자리도 드문드문 (그러나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그냥 맨 모래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배낭족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나는 아직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제 해가 중천을 넘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기에 나는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오후엔 아르떼뮤지엄에 가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돗자리를 펴고 하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갈까...?'


내가 귀차니스트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귀찮아서라고? 아니다 나의 귀차니즘이라면 가능한 말이다. 내 삶엔 간절하면서도 귀찮아서 포기한 것들이 실제로 많았기에.

나는 내가 정말 귀찮은 것인지 아님 용기가 나지 않아 귀찮음 뒤로 도망치는 것인지 헷갈려하며 파도가 해변 모래밭에 부딪쳐 부서지며 하얗게 보글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문득 주차 요금이 얼마나 나왔을까도 신경이 쓰였다. 카페에서도 한참 있었는데 공영주차장이어도 꽤 나온 것은 아닐까? 무의식이 그냥 돌아갈 것을 종용하다 못해 주차요금 걱정으로까지 생각이 뻗치자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움이 스쳤지만 갈등을 접어버리자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엔 맨 모래사장에 발라당 누워 다리 한 짝을 무릎에 올린 채 두 팔을 배게 삼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돗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모래바닥 위에 혼자서 자빠져 있었기 때문에 눈길을 확 끌었다. 마치 자기 집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편안해 보이는 그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사람은 주변의 무엇도 의식하지 않은 채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갑자기 뽐뿌가 온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차에서 돗자리와 피크닉테이블을 꺼내 들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는 내게 같은 이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때로는 우연한 계기로 용기를 얻기도 한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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