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정오를 지나 기울어 가는 해와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과 질감이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바다는 마치 나의 마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언제까지고 우리를 설레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멍을 하다 짧은 글도 써보고 사람구경도 하며 한동안 바닷가의 피크닉을 즐기던 나는 어느 순간 썰렁한 기운을 느꼈고 손발이 시리고 허리가 아파지더니 이제 그만 일어나고 싶어졌다.
바람 부는 해변에서 혼자 이리저리 날리는 커다란 돗자리를 털어 접고 피크닉 테이블을 챙겨 이고 지고 바다를 뒤로한 채 주차장으로 향했다. 얼굴엔 짠내가 건조하게 달라붙어있었고 약간의 번거로움과 피로감조차 기분 좋게 느껴지는 늦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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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라고 하기엔 저녁에 가깝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밝은 어정쩡한 시간.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걱정할 것 없다. 답은 정해져 있다.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아르떼뮤지엄이었다. 아르떼뮤지엄은 경포호 근처에 위치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상설전시관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내가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미리 정해둔 일정이었다.
예전에 DDP전시관에서 처음 미디어아트라는 걸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버렸는데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로망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체험이었다.
(불과 10분 만에) 나는 여행지에서 다시 더 먼 여행을 떠나는 설렘을 안고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입장했다. 평소라면 어김없이 남들 눈치도 좀 보고 쭈뼛거리기도 했을 테지만 이곳은 들어가자마자 본 적 없이 현란한 세계가 펼쳐져서 홀린 듯이 빠져들어버렸다.
끝없이 파도가 밀려오던 파아란 바다를 떠나 이번에는 보랏빛 하늘 아래 검푸른 파도가 치는 신비로운 밤바다를 만났다. 사방을 뒤덮은 꽃밭을 지나 달님에게까지 가 닿은 꽃잎의 향연 속에 한참을 머물렀다. 수천수만의 꽃송이들이 가장 싱싱한 채로 단 한송이도 시들지 않은 그곳에서는 백호를 만나도 죽지 않고 모네와 고흐와 고갱과 클림트의 명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어떤 풍경이나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아름답다 재밌다 감동적이다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곤 한다.
노을 지는 초저녁 금빛 햇살을 받아 아늑하게 빛나는 낯선 마을을 관통해 갈 때, 옹기종기 귀엽게 모여있는 작은 집들과 연두색으로 피어오른 논과 밭. 원근감을 주며 앞뒤로 얼기설기 보이는 크고 낮은 산들과 개구지게 구불거리며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작은 길들을 보며 나는 마음에 평화를 느꼈었다.
고흐의 전시회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캔버스 위 생생한 붓칠의 결에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꼈었다.
하지만 미디어아트는 접할 때마다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현실처럼 체험하게 되기 때문에 생경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현실에서는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미디어아트에서는 나보다 몇 배는 커다란 꽃잎을 마주하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것들이 현실처럼 구현된 공간에서 색다른 경험을 간접 체험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사고와 상상력도 틀을 깨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 나는 오히려 긴장이 풀리고 안도하게 된다.
이래야 할 것 같고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세상에서 억압되고 쫓기고 초조하던 마음들이 이래도 저래도 다 괜찮다고 다독임 받는 느낌이랄까.. 혹은 이것도 저것도 다 가능할 것 같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랄까..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준다.
문득 어릴 적 처음으로 63 빌딩의 수족관에 갔을 때 물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신기한 광경에 설렜던 기억이 났다. 내가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경험했을 때 나는 쫄보 주제에 두려워하기보다 즐거워했던 것 같다.
추리소설과 모험 영화를 좋아해서 친구들과 같이 (때로는 혼자서라도) 동네 뒷산을 헤매며 나무뿌리를 산삼이라고 캐오거나 무식하게 버려진 담배꽁초들을 주워다가 정체 모를 범인을 찾는다며 탐정놀이를 하던 소녀. 책과 영화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그 소녀는 이제 도파민의 노예가 되어 유튜브만 보고 있지만 혼자 삼각대를 들고 다니며 전시관 구석구석을 신나게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어릴 적 그 소녀가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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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시선, 생각, 기준을 의식하느라 정작 나의 것들을 놓쳐온 시간들이 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야 해서 성적에 맞춰 과를 택하고 남들 다 하는 취업을 해야 해서 생각도 없던 곳에 이력서를 넣고 어떻게 하면 남들 보기에 무난할까를 생각하며 지냈다. 남들을 따라 해온 것들은 평범하고 안전해 보였지만 참으로 따분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내가 꿈꾸던 것들은 뒷전이 된 채 어떤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삶이 되었고,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이제 무언가 일을 시작하기보다 잘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편이 더 어울리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남들을 의식하다 원하는 삶을 못 살았다고 푸념하는 이 이야기는 비단 나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차고 넘치게 흔해빠진 이야기라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지점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들을 의식하느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못 살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맞추어 왔지만 사실은 다들 각자 눈치 보지 않고 제멋대로 살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치 주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감시자가 되어 모나지 않게 평범하게 살기를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웃픈 아이러니로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이 꿈꾸고 그렸던 삶을 살기 위해 더 도전하지 못했던 나의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다. 내가 쫄보든 귀차니스트이든지 간에 내가 원하는 삶이었다면 어떻게든 용감하게 헤쳐나갔어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100미터를 18초 미만으로 달릴 수 없는 사람처럼 바랬던 결과는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최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연재일인 오늘에서야 시간에 쫓기며, 쫓길수록 멍해지는 나이지만 엮이지 않는 생각과 글들을 어떻게든 꿰어 글을 올리겠다는 마음으로 용을 쓰며 쓰고 있다. 그러게 미리 좀 써두지. 어쩐지 글이 횡설수설하더라. 읽는 이들에게 비판받을 수도 실망감을 줄 수도 있겠으나 어쩌겠는가. 그것 역시 타인의 시선이고 나로선 그럴 수밖에 없이 흘러온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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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나 전시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딸기우유 같은 음료 한 잔을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찻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테이블 위로 꽃들이 펼쳐졌다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이 예뻐서 계속해서 찻잔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았는데 한순간 테이블이 아무런 반응 없이 껌껌해졌고 쫄보인 나는 내가 너무 반복해서 찻잔으로 내리쳐서 테이블이 망가진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쿵쾅쿵쾅 심장이 나대고 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직원에게 알리려는 순간 다시금 찻잔주위로 붉은 꽃들이 촤르르 퍼져나갔다. 설정된 시간이 끝났다가 재시작이 된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다고 우와우와 하다가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쫄아버린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쫄보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