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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엘린 Nov 08. 2024

동네구경

-같이 하면 우리는 브런치 세트



이십 대 때는 주말이면 무조건 시내로 나갔다. 꾸꾸꾸로 차려입고 종로나 명동이나 대학로, 강남역이나 압구정 로데오 같은 번화가를 찾아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지치지 않는 젊은 혈기를 자랑했(었)다. 쪄 죽다 못해 타 죽을 것 같은 불볕더위에도 찐 분홍 틴트를 바른 입술이 퍼렇다 못해 하얘지고 마는 한파에도 하이힐을 신고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굳이 굳이 먼 길을 떠났다.

토요일 낮, 서울극장 앞은 놀이공원 못지않게 긴 줄이 늘어섰었다. 기다리는 연인들은 힘든 기색 없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끝없이 속삭였고 비슷한 화장과 복장을 한 친구들은 까르르까르르 쉼 없이 웃어댔다. 그리고 주전부리를 좋아하던 나 역시 한껏 멋을 낸 채 오징어를 뜯으며 그 행렬에 끼어 있었다.


그랬던 나인데... 언제부턴가(꽤 오래전부터) 피치 못할 일정이 아니라면 주말에는 번화가를 피하게 된다.

주말의 번화가는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포화상태라 뭐 하나 사려고 해도 보려고 해도 먹으려고 해도 길게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다.

평소에도 이유 없이 피곤한 상태인 나는 이제 주말이면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가고 영화는 조조나 심야에 가능하다면 리클라이너관을 선호한다. 그리고 영화 관람료부터 핫도그 가격까지 다 오르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신발장에는 하이힐 대신 운동화가 늘어가고 그럼에도 점점 덜 걷게 되는 것은 왜 때문일까?

이십 대의 나와 사십 대의 나.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그대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세상 모든 것은 대부분 변하고 그 사실은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주전부리에 대한 갈망뿐이다.




남편의 선물. 내가 요새 쫀친자가 돼버린 이유는 바로 아래에...




금기를 깨듯이 지난 토요일에 종로에 나갔다. (지난 두 주 동안 휴재를 했던 그 개인사정에 대한 위로의 선물로) 남편이 금반지를 선물해 준다고 해서 같이 사러 나간 것이다. 금반지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애호하던 장신구이기에 이날만큼은 붐비는 시내라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반지를 주문하고 나서도 어쩌다 보니 인사동부터 삼청동까지 해가 지고 밤이 될 때까지 신나게 돌아다녔다. 십원빵과 치즈계란빵으로 시작해서 유레카를 외치고 싶게 만든 황남쫀드기와 와플이 꽂혀있는 아이스크림까지 길거리 음식 도장 깨기를 하고 있자니 십오 년쯤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쫀드기라고 다 같은 쫀드기가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폴바셋 뺨 때리는 아이스크림...♡




해 질 녘,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횡단보도 앞에는 한 마술사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넛모양으로 두세 겹 둘러 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할 정도로 그 마술사는 열연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공연을 한지 십 년이 되었다는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해서 걸어온 자신의 여정을 덤덤히 말해주었는데, 먹고살 수는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걷다 보니 이 일로 먹고살고 있고 몇 년 전에는 결혼도 했다고 한다.


나는 공연의 후반부만 보았기 때문에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두 명의 관객의 도움을 받아 몸에 쇠사슬을 친친 감고 시답잖은 장난을 치고 이런저런 이야기(위에 언급한 내용 같은)를 하다가 끙끙대며 사슬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순전히 힘과 요령만으로,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분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혀 마술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마술 같았고, 그런 기분을 나만 느낀 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눈을 부라리고 몸을 비틀면서 온 힘을 다해 사슬을 풀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같이 이를 악물기도 하고 함성과 박수로 응원을 했고 기어이 그가 사슬을 풀고 자유로워지자 다 함께 열렬히 환호했다. 공연 중간중간 몇 번이고 후원을 유도하는 모습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노련했고 실제로 공연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냥 가지 않고) 관람료를 내려고 모여들었다. 우리도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현금을 탈탈 털어 관람료를 냈다.


결혼하기 한참 전에도 나는 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현란한 마술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마술을 몇 개나 보았고 나중에 그 마술사를 검색해 봤을 정도로 재밌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삼청동 골목을 오르면서 구 남친(현 남편)과 신기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는데 그런 공연이었음에도 나는 지갑 속의 현금을 탈탈 털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술이라고 하기엔 차력에 더 가까워 보이는 쇼를 하나 보았을 뿐인데 기꺼운 마음으로 관람료를 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식상해 보이고 마술 같지도 않은 쇠사슬이지만 최선을 다해 그것을 멋진 공연으로 만들어내던 그의 모습이 내게 감동을 줬기 때문이다. 봐주지 않으면 초라해지고 날이 궂으면 처량해지고 마는 어찌 보면 연약한, 한낱 무명 예술가의 반짝이는 열정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삼청동 골목길로 접어들자 아기자기하면서도 저마다의 취향으로 꾸며진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들어서는 골목마다 색다른 매장들이 눈길을 끌었고 거리들을 가득 채운 젊은이들과 그들 사이에 드문 드문 등장하는 늙은이들(낮잡아 쓴 표현 아님 주의)의 한껏 꾸민 모습들도 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했다.

밤을 밝힌 아늑한 불빛들과 알록달록한 공간들과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낯선 나라를 구경하는 것만 같았다. 그 나라는 참으로 활력 있고 다양한 매력으로 넘쳐나서 다소 무기력해져 있던 나에게까지 그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나의 눈에도 반짝 빛이 켜지고 나의 마음에도 새로운 희망이 움튼 달이 해 같이 밝은 밤이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두 달 넘게 훌쩍 지났다.

그동안 월요일과 목요일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총 10화로 첫 연재였던 <싸이감성>을 마무리했고 금요일마다 연재하고 있는 <같이 하면 우리는 브런치 세트>도 이제 몇 화 남지 않았다.

시간은 정말로 성실하게 흘러가고 꾸준한 것들은 밤새 쌓인 눈처럼 어느 순간 놀랍게 커져간다.


<싸이감성>과 <같이 하면 우리는 브런치 세트>를 같이 연재하던 초반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브런치에 들어와 글들을 읽곤 했다. 주로 그날의 연재글들을 읽고 다른 요일의 연재글들도 읽고 연재글을 읽다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면 그 작가의 다른 글들을 읽기도 했다.

동네구경을 하듯이 브런치스토리의 글들을 읽으면서도 참으로 알록달록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길고 짧고 진지하고 가볍고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글들이 주기적 혹은 간헐적 시간차를 두고 끊임없이 발행되고 있는 이곳은 (내겐) 너무 빠르게 느껴져서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각자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으로 자신만의 문체로 써 내려간 다양한 글들을 읽는 것은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것을 넘어서 이 사람... 재야의 고수인가...!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



군더더기 없이 짧고 단순한 글인데 엄청 재치 있어 우! 와! 감탄하면서 읽었던 글
천재인가 싶은 문장력인데 글의 내용이 너무 심오해서 이해는 잘 안 갔던 글
내가 부러워하는 대문자 T인 것이 너무나 느껴지는 작가의 일목요연하면서도 냉한 느낌의 글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어쩜 저리도 의연하고 긍정적이다 못해 낙천적으로 지나고 있을까 단단한 내면이 부러웠던 작가의 글  
기가 막힌 은유로 맑고 청아하게 때로는 시리고 아리고 묵직하게 써 내려간 시들
글도 잘 쓰면서 그림과 사진같이 재능이 여러 개인 질투 나는 사기캐들의 글들
특출 나 보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진실된 마음이 너무 느껴져서 울컥하게 되던 글



기억력이 안 좋은 내가 순간 떠올린 글들만 해도 이렇게 줄줄이니... 세상에는 참으로 재능이 넘쳐난다.








이렇게 브런치스토리의 글들을 읽다 보니 나도 열심히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커져갈수록 어째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글을 쓰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잘 쓴 글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나의 초라함을 부각시켜 자신감을 떨어뜨리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나는 명백히 작심삼일(作心三日)과 일희일비(一喜一悲)의 대환장 콜라보인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특별함이란 게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명의 특별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특별하다. 진부한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초반에 분출하던 도파민이 점차 사그라들자 나는 이렇게 부작용을 겪으며 브런치를 조금 소홀히 대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겪게 되면서 결국 휴재까지 하고 말았다.



아마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고 초반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나처럼 점차 지지부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이것은 브런치스토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매사에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고 여러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점차 글쓰기가 부담스럽거나 귀찮거나 싫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에 미리 대비책을 마련해 두면 좋겠다.


나의 경우 다시 글을 쓰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은 역시나 '연재'였다.

연재글을 쓰기 시작할 때 최소 10화의 글을 완성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나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휴재를 할 때 마음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리고 맥시멈 2주의 휴재를 공지했기에 나는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계속되는 컨디션 난조로 결국 감기까지 걸려 고생 중이라 억지로 끌려오는 마음이기는 했지만 쓰다 보니 또 즐겁게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결국 글쓰기에 지치거나 어떤 이유로든 소홀해질 때 멈추지 않고 써 나갈 수 있는 각자의 장치를 하나쯤 마련해두라는 것이 오늘, 이 긴 글의 결론이다.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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