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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Oct 18. 2022

엄마라서 행복해

원래의 내가 사라져 버린대도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현진이와 유진이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에서는 2년에 한 번 가족들을 초청해 체육대회를 한다. 현진이 4살에 체육대회를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작년에 해야 했던 것을, 코로나 여파로 1년을 미뤄 올해 하게 된 것이다. 유일하게 현진이와 유진이가 함께 유치원을 다니는 올해 체육대회를 하게 된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다행이고 뜻깊은 일이었다. 현진이 4살엔 너무 어린 유진이와 나는 갈 수가 없어 아빠랑만 단출하게 다녀왔고, 그러니까 우리 가족 완전체가 함께 체육대회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진이는 체육대회 일주일 전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며 말도 안 되는 몸짓으로 스트레칭을 하거나 느닷없이 뒤로 달리기를 하면서, 체육대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해왔다. 유진이도 친구들과 나름대로 달리기 연습을 했는지, '내가 제일 빨라!'라고 외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달렸다. 그렇게나 기다려온 아이들의 체육대회이니, 오늘은 나 또한 '엄마의 모습'으로 신나게 즐기다 오겠다 다짐했다.

나에게 '엄마의 모습'이라는 다짐은 오늘 같은 순간엔 아주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일단 신이 나면 흥을 주체 못 하고 내가 아이들보다 더 방방 뛸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이미 친해진 다른 엄마들이 많이 있을 테고, 흥을 돋우기 위한 음악이 있을 테고, 내가 좋아하는 달리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나 몰라라 하고 신이 나 날뛰다 그만 혼자 지쳐버리고 말아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두 가지의 자아가 있다. 인간 김은정으로서의 자아와 엄마로서의 자아. 인간 김은정으로서의 자아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혼자보다 함께를 좋아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가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충천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금세 가라앉고 마는 저질체력의 기분파 인간. 기분이 좋으면 앞 뒤 잴 것 없이 누구보다 신나게 놀지만, 돌발적이고도 갑작스러운 상황에는 극도로 예민해지는 계획형 인간. 사실 원래의 나는 엄마가 되기에는 아주 부족한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현진이를 낳은 뒤 나에게는 원래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자아가 생겼다. '엄마'라는 이름의 자아.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수시로 일어나는 돌발상황과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에도 의연해야 하고, 아무리 답답해도 코로나가 심한 상황에서는 집 밖으로 나가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신나고 흥분했더라도 얼른 이성을 찾고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해 자주 다치는 두 아이를 신경 쓰고 돌보아야 하며, 불쑥 튀어 오르는 화를 참고 느닷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끌어올리며 늘 밝고도 온화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해야 하는, 나의 두 번째 자아. 현진이와 유진이의 엄마.

오늘 체육대회에서는 아주 신이 났고, 두 아이들을 열심히 응원하느라 목이 쉬었고, 부모가 참여하는 모든 경기에 열정적으로 임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지만, 오늘의 나는 확실하게 엄마였다. 목이 마르다면 부리나케 달려가 물을 가져와 먹이고,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응원을 하고, 반이 달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이 사이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챙겼다. 체력은 이미 방전이었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흥이 남은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것까지. 오늘은 나의 굳은 다짐대로 '엄마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임한, 럼에도 그 누구보다 즐겁고 신이 났던, 뿌듯하고도 기분 좋은 하루였다.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결혼은 했지만 출산은 아직인 친구들을 볼 때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의 자유로움이 부럽고, 그들의 외로움이 부럽고,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그들의 하루가 부러운 날이 있다. 선선한 가을 저녁이면 한두 시간씩 공원을 걷다 오고 싶다. 여유롭게 레스토랑엘 가서 술 한 잔과 함께 아주 오랫동안 느긋한 식사를 하고 싶다. 문득 영화를 보고 싶으면 남편과 손잡고 영화를 보러 가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순간엔 어느 때고 문을 닫고 쉬다 나오고 싶다. 아이를 낳기 전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나의 모든 일상들이 이제는 기약 없는 그리움이 되었다. 30년간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라 믿어왔던 '인간 김은정'으로서의 자아를 당연한 듯 감추고 살아가게 되었다. 문득문득 아쉬울 때가 있고 그리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젊고 자유로웠던 나의 20대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단호하게 'NO!'를 외칠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엄마'를 버리고 '인간 김은정'으로서만 살고 싶다 바란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다. 원래의 내 모습이 아닌 엄마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건 때론 힘들고 지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이 좋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두려울 만큼 커다랗고 끔찍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나에게 달려와 웃어주고 안아주는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늘 내 옆에 존재한다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행복하다. '엄마'로만 존재하다 늙어가고, 그래서 예전 나의 모습은 그렇게 잊힌대도, 그래도 나는 지금이 내 인생 최고로 좋다.

내가 현진이와 유진이의 엄마인 게 좋다.
나는 엄마라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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