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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May 30. 2022

명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괜찮은 건 바로 너희들 덕분이란다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명절의 가장 큰 기쁨이었던 세뱃돈이 확연히 줄었음을 확인한 그날부터, 어린 내 마음엔 도대체 명절의 의미가 뭐란 말인가 하는 반발심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싫지는 않았었다. 명절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은 남들 눈에 비치는 나의 어느 모습들에 자신이 없어지면서부터였다. 가뜩이나 내가 사랑하기만 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많아지는 와중에, 명절에 모인 어른들의 입에서는 왜 그렇게 가시 가득한 말들이 쉽게 나오는 건지. 왜 이렇게 살이 찌고 여드름이 많이 났냐는 말이 듣기 싫을 때, 취업 준비는 잘 돼가느냔 말이 콕콕 박힐 때, 내 미래에 대한 주제넘은 걱정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나는 걱정과 위로라는 단어로 포장된 무례한 말들을 웃는 낯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명절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투성이가 되었고, 아마도 그때부터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예의 없는 말을 쿨하게 넘길만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을 한 뒤에도 명절을 대하는 자세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왜 남자의 부모님을 먼저 찾아뵙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지 이해할 수 없고, 자주 못 보는 친척들끼리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게 명절의 취지 같지만 나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의무처럼 즐거워야 하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놀랍게도 명절이 꽤나 괜찮아진 것은 순전히 아이들 덕분이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세뱃돈을 받는 일이 마냥 신나고 즐거운 내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뻐 죽겠는 나의 아이들이 부모 아닌 다른 사람들 눈에도 예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현진이를 낳기 전까지 시댁에는 아기가 없었고, 현진이는 명절 아침 낯선 사람들 틈에서 주인공이 되어 작은 옹알이만으로도 모든 가족들을 웃게 만들었다. 나의 아기를 다른 사람들이 예뻐해 주는 모습이 나에 대한 그 어떤 칭찬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 좋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나는 명절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명절이 괜찮아진 건 아이들의 탄생 덕분이다.




낯선 어른들을 대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때론 놀랍다. 나름 명절의 기억이 또렷한 나의 10대 시절을 돌이켜보면, 매번 돌아오는 명절을 앞두고는 지난 명절보다 어떤 면에서는 나아진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예뻐졌다거나,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다거나, 좋은 곳에 취직을 했다거나 하는. 보다 나아진 것을 찾지 못한 명절이면 나는 차라리 투명인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끄러운 거실을 피해 방 안에 조용히 앉아있곤 했다. 나와는 달리 나의 아이들은 많은 어른들 틈에 가면 본인이 예쁨을 받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고 자신 있어 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고 또한 그 순수함이 부럽다. 어른들이 하는 말에 나쁜 마음이 하나도 없었더라도 자주 꼬아 듣곤 했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어른들의 떤 말에도 사랑받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아이들의 기특한 모습을 확인하는 매 명절마다, 나는 나와는 닮지 않은 그 단단함이 오래가기를 늘 바랄 뿐이다.


이미 코로나를 겪으며 명절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고, 시간이 지나며 내가 겪어온 명절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달라질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건, 아이들에게 명절은 그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날이 되면 좋겠다. 명절의 가장 큰 즐거움인 세뱃돈이 없어지는 날이 와도,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명절이 좋은 이유가 하나씩은 있으면 좋겠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없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려면 훨씬 더 어른인 내가 '명절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야', '어른들이 다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명절이니 이런 걸 하는 건 당연한 거야' 같은 태도를 보이면 안 되겠지. 젊은 내가 갖고 있는 이런 마음을 나이 먹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잊으면 안 되겠지.




그리고 단순히 명절에만 국한되지 않는, 아이들을 향한 나의 바람이 있다면 이것이다. 무엇보다 현진이나 유진이가 날카로운 말들에 쉽게 상처받고 흔들리는 나약한 마음을 가지진 않으면 좋겠다. 예민한 10대가 되어도, 생각 많은 어른이 되어도, 다른 사람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의 깃털 같은 무게가 내 아이들의 마음에는 묵직하게 내려앉지 않으면 좋겠다.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하더라도 명절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하는 시간들은 계속 이어질 테고 그 시간들을 아이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나보다는 덜하면 좋겠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떻든 나만큼은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고 있으니, 다른 이의 무례한 걱정 같은 건 크게 상관없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나의 이야기. 나는 명절이 괜찮다. 괜찮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아들 자랑, 딸 자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보다 나아진 것이, 새로운 자랑할 것이 무궁무진한 명절은 이렇게 괜찮을 수 있구나. 고마워 언제나 나의 가장 큰 자랑, 나의 아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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