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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Oct 21. 2022

우리는 같이 공부하는 사이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위해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요즘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전화 영어 수업을 하고 유튜브를 보며 영어 공부를 하고, 현진이책을 함께 읽으며 분명 배웠을 테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지식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애쓰고, 육아서적을 읽으며 아이를 키우는 방향에 대해 수시로 고민한다. 이 모든 공부는 절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다. 재미있어서 하는 중이다. 살면서 오로지 나의 의지로, 정말로 재미있어서 어떤 지식을 습득해본 적 있었던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귀찮고도 고단한 일이라 여겨왔고, 내가 해온 공부라고는 단지 코앞에 닥친 시험을 위한 벼락치기 공부뿐이었다. 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마치 내 껍데기를 빌려가 앉아있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놀랍고 신기하다.


현진이는 그런 나와는 달리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아이다. 우주에 관심이 있을 땐 갈증을 해소하려 물을 마시듯 온갖 우주에 관한 책을 끊임없이 읽어달라며 가져왔고, 수학동화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는 수포자인 나에게 약수나 지수 같은 개념에 대해 설명해주며 신나 했다. (현진이가 처음 지수를 아는지 물어봤을 때, 나는 유치원에 새로 온 친구 이름인 줄 알았다.) 현진이에게 수많은 책을 읽어주다 보니 나도 현진이와 같이 아는 것이 점점 많아졌고, 어느 순간부터 현진이와 특정 주제를 두고 마치 토론하듯 이야기하는 시간이 그렇게 재밌고 신날 수가 없었다. 내가 공부를 난생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현진이었다.


요즘 현진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역사다. 그간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다녀온 현진이는, 그의 인생 첫 궁궐 투어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우리는 경복궁에 관한 책들을 여러 번 읽고, 유튜브에서 경복궁과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며 며칠간 꽤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퀴즈를 내서 맞추며, 궁궐 구석구석을 알차게 보고 느꼈다. 리는 오늘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진이는 엄마와 함께 와서 너무 좋다는 예쁜 말로, 며칠 전부경복궁에 많은  시간을 보낸 나를 더욱 뿌듯하게 만들어 줬다. 이 맛에 공부하지.  덕분에 나도 즐겁게 공부했던 거야. 나도 너와 함께 경복궁에 와서 기뻤어. 언제나 그랬듯 나는 오늘도 뿌듯하고 행복했지만, 오늘 같은 순간이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함께일 수 있을까 는 생각 행복의 한가운데를 문득 무심하게 스치고 지나가곤 한다.

 



현진이와 함께 하는 매일의 시간은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만, 사실은 가장 큰 두려움이기도 하다. 내가 공부를 좋아하게 된 것은 함께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아는 것을 공유하는 우리의 시간 때문이다. 내가 현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학년이 올라가고 현진이가 배우는 내용이 깊어지고 어려워진다면, 녹슬기 시작한 나의 뇌는  흡수력 좋은 어린 현진이의 뇌를 따라 수 있을까. 현진이가 알아가는 게 많아질수록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질 테고, 어느 순간 현진이나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에 흥미를 잃 될 미래 어두운 밤 원치 않는 손님처럼 나를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 나는 현진이와 함께 하는 오늘을 행복해하면서도 우리의 막연한 미래를 함께 걱정한다.


현진이가 나와 함께 있는 순간보다 혼자 있는 순간을 더 아끼는 날이 온다면, 아니 필연적으로  그날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아주 많이 허무해질 것 같다. 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진이와는 달리, 알고 있던 것들을 점점 잊어버리는 나의 나이듦을 평온한 마음으로 인정하기가 힘들 것 같다. 목적이라고는 오로지 현진이와 함께 하는 시간뿐이었던 나의 공부는 갈 곳을 잃을 테고, 나는 나의 빈 시간을 이제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한참을 텅 빈 채 방황하게 될 것 같다. 맑고 예쁜 하늘을 바라보며 언제 올지 모를 먹구름을 걱정하듯, 행복의 순간을 지나는 동안 언젠가는 겪어야 할 그날들을 자주 두려워다.




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공부를 한다.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는 문제가 나오기 시작한 현진이의 수학 문제집을 보며 현진이와 나를 잇는 줄 하나가 이미 느슨해졌음을 아프게 느끼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공부를 한다. 지금 열심히 할수록 미래에는 내 역할이 사라짐을 더욱 프게 느끼겠지만, 내 시간을 더 많이 쏟아부을수록 미래에 남아도는 시간 더욱 허무해지겠지만,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우리가 함께 알게 된 것을 현진이와 나누고 싶다. 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함께 하고 싶다.


현진이가 나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고 어른이 되어서도 흐리지만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나의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려는 이유는, 그저 지금 현진이가 나랑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그거면 됐다. 나의 노력이 오늘의 현진이를 행복하게 한단 사실이 나를 열심히 살게 만든다. 미래를 걱정하며 몸을 사리기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현진이와 책을 읽고 퀴즈를 내고 대화를 나누고 난 뒤 현진이가 폴짝 뛰며 '좋아!'를 외칠 때마다 자꾸만 주체 못 할 힘이 샘솟는다.


우리의 경복궁은 아주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현진이는 요즘  일제강점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유관순 누나는 정말 멋지다며 수시로 감탄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일제강점기를 공부할 시간이다. 내일 현진이가 등원하고 나면 현진이와 읽을 책을 미리 봐 두고 유익한 동영상을 찾아보고 함께 갈만한 박물관을 찾아봐야겠다. 현진이 덕분에 내일 나의 하루도 유익하고 바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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