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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들 Apr 25. 2024

애를 낳았을 뿐인데 글쓰기 능력을 잃어버렸다

엄마가 된 후 글을 쓰려고 바꾼 것들


변명일까?


아이를 낳고 나서 글쓰기 능력이 아주 아주 퇴화되어 버렸다. 아이를 탓하고 싶진 않은데, 그냥 그렇게 됐다. 기사를 쓰고, 논문을 쓰는 일을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로 얻은 기회와 보상이 많았기 때문에 나에게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재능은 여러 조건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했단걸, 글쓰기를 못하게 되자 알게 되었다.


우선은 체력.

아이를 낳고 나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원래도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수면 부족에, 운동도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끼니를 못 챙겨 먹다가 허기가 지니까 폭식을 하는 식으로 잘못된 식사를 반복했다. (엄마들은 알 것이다. 낮에 밥 먹을 시간 없다는 거...)


두 번째는 뇌기능.

아이를 낳고 나서 뇌기능이 상당히 감퇴했다.

출산이라는 충격에 의해 발생한 물리적인 변화 때문인지, 그저 아이들이 계속 불러 대는 산만한 상황 때문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원래도 있던 건망증은 더 심해지고, 집중력은 상당히 저하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빨리 해냈을 일을 아주 오래 해야 했다. 결과물의 질 또한 많이 떨어졌고 말이다.


세 번째는 시공간.

글을 쓰려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생각을 좀 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불가능한 상황에서 글쓰기는 사치였다. 글도 운동처럼 습관이 중요한 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미루다 보니, 점차 글 쓰는 게 힘들어졌다.


네 번째는 커뮤니티.

항상 글을 쓸 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기사를 쓸 때는 편집회의를 했고, 논문이나 책을 쓸 때는 세미나를 했었다. 글을 쓰고 나면 온 오프라인 매체에 실리고, 학회지로 출간이 되었다.

그 글은 한 명이라도 보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집에 많이 머물게 되자 그 글쓰기 커뮤니티 또한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는 몰랐다. 내가 여러 사람의 연결 속에서 글을 썼다는 것을.


건강한 몸, 글을 쓸 수 있는 시공간, 다른 이와의 연결이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면, 체력도, 시공간도, 관계망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글쓰기는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한동안 울며 한탄만 하다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몇 가지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면 기회를 어떻게 만들까?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걷기로 했다. 걸을 일이 있으면 최대한 걸어 다녔다. 도서관에 갈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운전보다는 걷기 선택.


잠을 최대한 많이 자기로 했다. 이젠 아이들이 커서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10시 전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도 그 시간에 잔다! 어떨 땐 아이들보다 더 일찍 자기도... 잘 수 있을 때 최대한 자 둔다.


감퇴된 뇌기능은 잘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이걸 만회하기 위해서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여기저기에 기록을 해 둔다. 캘린더에도, 수첩에도, 사진첩에도, 메모장에도.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을 빼내서 다른 곳에 위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어려운 내용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논문 수준의 글을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기엔 힘들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자료를 붙들고 있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


대신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 내고, 살면서 겼었던 재미있는 경험을 위주로 에세이를 쓰고 있다. 그것도 나의 뇌 용량이 허용하는 만큼만. 그러다 보니 지식보다는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껴진 것, 깨닫게 된 것을 위주로 적고 있다.


시공간의 배치도 바꾸었다. 글 쓰고 공부하는 시간을 저녁과 밤에서 새벽과 오전 시간으로 옮겼다. 엄마가 오로지 혼자 있을 수 있는 틈새 시간이 새벽과 오전이다.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 책을 읽는다.


아이가 등교, 등원을 하고 난 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오기 전에 집안일을 해야 하므로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엄마들의 브런치 타임에 글을 써야 한다. 이마저도 방학 때는 불가능해서, 시간을 잘 사용하려고 한다.


그래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데, 설거지를 하면서 글 쓸 거리를 구상하곤 한다. 집안일을 하면 자료를 볼 시간은 없지만 생각할 시간은 확보할 수 있다.


끊긴 관계망을 잇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온라인이다. 아침에 책 읽는 모임을 줌(ZOOM)에서 한다. 주 5일 같이 책을 읽다 보니,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정이 느껴진다. 온라인으로 개설된 강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을 이용하는 건 필수다.이 네이버 블로그뿐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에 글을 쓴다. 혼자 워드에 글을 쓸 때보다,


조회 수가 많지 않더라도 온라인에 발행을 해 세상에 접속해 본다. 이 기록들이 언젠가 누구에게라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걸어보면서...


또한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SNS를 보면, 거실 한 편에 작은 책상 하나를 두고 글 쓰는 엄마를 만날 수 있다. 독박 육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베란다 앞에 서 보았다는 이야기도 글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


이 생각만으로도 힘이 나곤 한다. 그게 글의 힘인 것 같다.


하나의 길이 끝나면, 곧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이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을 헤아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잃은 것도 있지만, 대신 더 낮은 자세로 가볍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젠 무게를 잡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요구나 데드라인을 맞출 필요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이것저것 쓸 수 있는 만큼 써보는 자유도 맘껏 누릴 수 있다.


이 또한 언젠가 꿈꾸었던 모습 아니었나?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은 아니지만(?)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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