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했던 오후
고구마를 찌려고 작은 찜냄비에 고구마를 넣어 가스불에 올리고 불을 켰다
잠시 방에 들어가 고구마가 익을 동안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두 시간이 넘게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뜨고 나서도 고구마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데
방 안으로 고구마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아차!
후다닥 주방으로 나가보니 다행히 가스불이 저절로 꺼져 있다
아마도 가스기기에 안전장치가 있었던가 보다
냄비를 열어보니 고구마는 잘 익은 채로 놓여있었다
하지만 고구마가 담겨 있던 냄비 윗부분을 들어 올리니
물이 담겨 있던 밑부분의 냄비는
고구마 전분이 까맣게 타서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이고 이걸 어떡 하지
일단 물을 가득 부어 놓고 어찌할 엄두가 나질 않아 하룻밤을 그대로 지냈다
다음날에도 냄비를 어떻게 처리할지 손댈 엄두를 못 내다가
일단 손으로 까만 더께를 만져보니 두꺼운 껍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휴, 씁쓸한 마음으로 철수세미를 손에 들고 어찌해보려는데
두꺼운 더께 구석에 조금 벗겨진 부분이 보이는 듯했다
손끝으로 그 부분을 살짝 밀어내니 까아만 더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라! 손이 닿는 곳마다 차츰차츰 까만 더께가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께가 떨어져 나간 부분은 깨끗한 스텐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그 두껍던 더께들을 마침내 다 뜯어내었고
얼룩진 부분만 철수세미로 싹싹 닦아주었더니
마치 냄비는 전보다 더 새것과 같은 스텐냄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까맣게 더께가 졌던 냄비를 깨끗이 닦으면서
나는 내 속에 오래 묵혀 있는 까맣고 못난 더께들도
다 뜯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딱지처럼 앉아있는 서글픈 생각들도
말끔히 씻겨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냄비의 작은 부분에서 더께가 벗겨지기 시작한 것처럼
나의 마음 한구석에도 더께를 벗겨낼 수 있는 작은 솔기가 있을지 모른다
그 작은 솔기를 시작으로 나의 인생의 더께들을
하나하나 벗겨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작은 솔기는 용서와 자비와 이타심의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