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전의 기억인데 추억처럼 아득하다
저녁 밥상을 함께하기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퇴근길을 재촉했다.
아침에 아내가 한 솥 가득 끓이던 북엇국이 무의 뽀얀 국물과 어우러져 노릇한 기름기를 풍겨냈다. 평일 날 저녁에 교인들과 삶을 나누기 위해 모이고 이어서 책 읽기를 이어간다는 것이 여간 큰 기다림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저녁을 나누고 허기를 채우며, 한 주간의 삶을 진지하게 나누고 경청했다. 각자가 살아가는 영역에서 치열하게 신앙을 살아내려는 모습이 내게는 늘 도전이며 힘이 된다. 차와 다과를 비워가노라니 밤도 깊어졌다.
오늘의 책 나눔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큰 전율과 감동으로 오해가 풀리는 순간을 맞이했다.
오작녀와 그녀의 남동생이 박훈에게 보였던 정성은, 신분과 질서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숭고한 신앙처럼 비쳤다. 해방 직후 북에서 벌어지는 토지개혁의 과정이 소작인의 입장에서는 벼락같은 희망이지만,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혼란과 좌절이었을지 공감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땅과 많은 토지를 분배받기 위한 암투와 파렴치한 도둑질 그리고 배신.
카인의 원죄를 내제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벼움과 추함을 마주한다. 각자 읽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감상이 하나하나 주옥같다. 다음 주 한 주간 더 나눔을 갖자고 했는데, 벌써부터 기대된다. 책 나눔을 한다는 것만도 의미 있는데 그것이 신앙을 함께하는 교인들이라는 사실에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불과 1년 전의 기록이었는데 아득한 예전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가 불러온 사람들과의 단절, 고립, 조심스러움과 그리움.
북한에서의 토지 개혁은 1946년 3월 빈민과 농업 노동자로 구성된 ‘농촌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되었다. 일본인, 민족 반역자, 5 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의 땅은 몰수되어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농님에게 가족 수에 따라 무상 분배되었다. 북한의 토지에 대한 사회주의적 집단화가 이루어진 것은 6.25 이후의 일이다.
지주의 아들 박훈이 마을에서 운영해오던 야학을 당이 느닷없이 접수한다.
교단을 빼앗아간 것이다. 토지개혁의 바람을 둘러싸고 지주계급과 소작인 농민 마름 무산계급은 서로가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악랄하게 변해간다.
병약했던 박훈이 별이 쓰리는 밤, 바람이 꽤 세었던 서북 지방의 밤공기를 헤치고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등장하는 첫 씬과, 나이도 위였고 신분적으로는 훈에게 접근할 수도 없던 결혼에도 실패한 오작녀의 애틋한 사랑과,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훈을 지키려는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며 재산을 남겨두고서 함께 월남을 결심하는 훈의 모습이 내내 감동이었다.
1913년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난 황순원이었기에, 당시의 정황을 씨줄과 날줄로 엮고 복선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긴장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한편,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얼마나 악전고투를 겪어야만 했을까?'
더 악착같아지던가 더 투철한 이데올로기의 투사로 나서서 자신을 역으로 증명하던가.
한반도에서 이데올로기는 아픔이고 슬픔이 되었다. 냉정하게 숙고하고 정리하서 체화시키기 이전에 먼저 겪은 격변의 혼동이었다. 코로나의 멈춤에서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요구되는 이유다.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 황순원의 ‘소나기’라면 누구나 읽어보기를 원하는 책은 ‘카인의 후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