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인간문제’의 전체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이것은 ‘1910년생 김지영’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울대학 권장도서 100권에 올려지지 않았더라면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을 여성작가 강경애와 그의 소설은
내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소설을 읽을 때면 전개와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이번에는 내용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주인공인 선비의 감정과 상황에 몰입되어,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안타까움으로 아려왔다.
여성 작가이기에 여인의 마음을 더욱 잘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것인지, 상황의 묘사가 생생한 것인지, 밑줄 긋고 문장을 음미하며 곱씹고픈 구절이 많았다. 마음의 요동을 느끼자 애써 담담하려 나의 감정을 숨기고 더딘 속도로 책을 넘겼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절절함은 조선이나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조선의 운명처럼 기울고 조여드는 질곡의 삶에 포박당하는 주인공 선비가 애처로웠다. 농촌 지주인 덕호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았다면 선비의 아비도 죽지 않았을 텐데, 그의 아비 역시 모질지 못했다. 선비의 그늘이 되어주어야 했을 어미도 이내 죽음을 맞았으니 선비의 삶은 가시밭길이다.
가난해서 후처로 팔려가는 친구 갓난이를 바라보는 애달픈 선비의 안타까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바로 자신의 운명으로 다가왔다. 맘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지주 덕호는 일제의 호위까지 받고 있으니, 가난하고 꽃다운 선비 하나를 어찌 범하지 못할까. 덕호의 마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지만, 선비는 기어이 황해도를 탈출해서 인천의 방적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신분제 사회 조선왕조의 체계가 근대로 넘어가면서 부두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가 생겨났지만,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는 바뀌지 않고 더욱 교묘해졌다. 대지주는 마름을 통해 경작자를 다스려왔듯, 대자본은 관리자를 통해 노동자를 폭압적으로 다루었다. 그 자본의 끝에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는 조선에서 식민지로 이어지며 강력한 착취와 통제 속에서 뒤틀린 근대화로 향했다. 신분제에 의한 왕조의 봉건 질서가 해체되고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가 중심이 된 새로운 주체들이 주도하는 계몽과 혁명에 의한 근대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식민지화와 이어진 전쟁으로 시민의 성숙에 의한 근대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살아가던 고단한 선비의 삶이.....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거듭나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인간애의 발로가......
기껏해야 20살을 못 넘기고 살다 간 곱고 아름다운 여인을 지켜주지 못한 사회가......
사랑보단 조건을 따져 신분을 유지하며 호위 호식하려는 인간군상의 관계가 소설 속에 그려졌다.
'사람을 향해 서로를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사회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늘 요원하기만한 것일까?’
1906년에 태어난 여성 지식인 작가 강경애가
살아간 시대의 숨 막힘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내 할머니와 증조부 시대의 내밀한 아픔을 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1920년대, 꽃다운 소녀 선비의 모습에는 1960년대 'YH여공'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