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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Jul 20. 2021

TV에 출연한 그를 용케 알아보았다.

13년 전의 영상을 다시 보며

TV 채널을 돌리다 CGTN에까지 손길이 닿았다. 

막 서핑을 하면서 이동을 하는 순간이었는데 왠지 익숙한 인상착의에 시선이 멈췄다. 

체중이 불어 전에 비하면 좀 후덕해졌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영어방송엔 JIN WenBin Pianist라고 적혀있었다.   

  

13년 전, 뉴헤이븐 연합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을 때 보았던 청년이었다.

그때도 피아노를 잘 쳐서 중국에서 미국으로 스칼라십을 받고 유학 온 것으로 알고 있던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유명 피아니스트로 꽤 알려진 모양이다. 

제법 긴 시간의 토크와 연주로 이어가는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때 같은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일반 성인교인이 자기들끼리 끈끈한 청년들과 서로 마주하며 얘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중국 국적이지만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 출신이라 우리말을 한다는 것과 신앙이 있어서 한국인 유학생과 더불어 예배에 나온다는 것 정도랄까.     

중국의 변방인 연변에서 태어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중학교 때 대도시인 베이징으로 와서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다가 더 큰 무대인 미국으로 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다. 미국 대학에선 주말이면 친구들이 파티를 열어 서로를 초대하며 교류하는데 처음엔 그런 것이 약간 퇴폐적인 문화라 여겨 꺼려했다는 순진한 고백도 했다. 문화적인 오해와 차이가 있었는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고.     


진원빈은 2015년 예일대학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청년은 가정을 이루었고 아름다운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13년의 교회 영상에는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닌 성가대원의 일원으로서 불렀던 특송이 담겨 있었다. 그를 우연히 TV에서 보게 된 연유로 13년 전의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1년여의 신앙생활을 뉴헤이븐에서 보내면서 나는 중요한 날들을 영상에 담아 기록해 두었다. 

나의 달란트였고 내가 그 공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선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때의 꼬마들은 이제 어엿한 청년과 숙녀로 자라났다.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다고 설레며 좋아하던 내 아이가 이젠 내 키를 넘어선 청년에 이른 세월이다. 지휘를 맡았던 전도사님은 목사 안수를 받고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한참 연애하던 청년들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 변했다. 연세 지긋하시던 어른들은 하늘 본향으로 안식에 들어가셨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2008년과 2009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데는 생생한 동영상이 단연 진가를 발휘한다. 아카이빙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되살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임을 느끼곤 한다.  

    

그때 교회에는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예일대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 덕에 수준 높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등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태권도 사범들도 제법 많은 수가 있었고 자영업을 하시는 교포들도 다수였다. 우리로 치면 평창동이나 성북동에나 있을 법한 저택이나 타운 하우스의 가정에 초대받아 교제하며 음식을 나누던 때가 떠올랐다. 

이민 1세대들이 고생해서 안정을 찾으면, 그다음을 성실히 이어가는 다음 세대들의 모습에 위안을 

삼았던 성도들이었다. 


목사님의 말씀이 가끔씩 또렷이 기억나고 책으로 뒤 덥혔던 그분의 서재도 몹시 특별했다.

차가 없었던 우리 부부를 라이드 해주셨던 사모님의 마음 씀씀이는 지금도 따뜻하다.       

주일 예배 후엔 성인들이 정성껏 준비한 점심을 집밥 보듯이 감격하며 맛있게 먹던 유학생 청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특히 진원빈이 피아노에 앉지도 못할 만큼 듬직히 그 자리를 지키며 건반을 연주했던 그 자매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때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던 유일한 백인 미국인이 떠올랐다. 

가끔씩 멋진 트롬본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던 교인.

뉴헤이븐 연합 감리교회는 백인들이 교회로 사용하던 공간을 한국인 커뮤니티가 접수했다. 백인들이 다운타운을 벗어나면서 수도 줄고 사람이 감소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는 인수.

그분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했던 그 공간을 떠날 수 없어서 계속 예배에 참석했었다.

우린 한국어를 사용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안부도 궁금하다.    

  

단지 1년의 기억이지만 가끔씩 그때가 그리워지곤 한다.  

아마도 내가 누렸던 가장 만족스러운 쉼인 안식년이었기 때문일까?

리먼 브라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몰려오면서 가장 비싼 환율에 허덕이던 때였지만

반면에 마음이 평안했던 시절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요동치는 세상에서 그때를 떠올린다. 

또다시 나름의 안식년을 꿈꾸고 싶기 때문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v0EZU4yiDTE    뉴헤이븐연합감리교회 2008년 성탄예배

https://www.youtube.com/watch?v=vl9xFDHCehA     뉴헤이븐연합감리교회 2009년 부활절예배

https://www.youtube.com/watch?v=TA6Bm4OaSww 뉴헤이븐연합감리교회 2009년 성찬식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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