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로 된 서적을 볼 때 놓쳤을지 모르는 뜻과 내용을 영상으로나마 보충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특히 등장인물이 많거나 서로의 감정이 얽혀있을 때 그리고 문장의 메타포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영상을 통해서 납득해보려 애썼다. 어떤 때는 글에서 느낀 감동을 스크린에서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정반대의 흐름이다.
빨간 머리 앤을 넷플릭스의 시리즈로 먼저 만나고 나서 차례로 책을 구입했다.
시즌 1이 어린 앤의 개인사에 맞춰졌다면 시즌 2와 3으로 갈수록 당시 북아메리카의 사회상이
얽히고설켰다.
"Anne of green gable"은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편견과 차별에 맞선 계몽주의적 사상을 담지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땅과 자원을 차지하며 원주민들을 내몰고 다스리는 것에 아무런 가책이 없던 시절이었다. 소수의 우세한 종족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고 노예화하며 정복하고 교화하는 것을 신의 축복쯤으로 치부하는 세계관 속에서는 여자도 남자들 소유의 일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편만하게 퍼지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불평등한 가치인가를 여류작가 몽고메리는 앤의 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도발한다.
시작은 부모가 없는 고아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다.
근본을 모르는 아이를 입양한다는 무모함, 그것도 소년이 아닌 노동력에 도움이 안 되는 소녀를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소녀는 받아들여졌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이 또래에 비해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며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당돌하고 당찬 앤.
유능한 남편감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미덕이던 소녀들은 서서히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당당히 대학교육을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기성세대의 바람에 굳건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신문이 인쇄기로 찍혀서 파급력을 지닌 매체가 되고 여성의 권리와 인디언 등의 인권을 다루기 시작할 때는 계몽과 구습의 대결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보딩 멤버가 남성이 주류인 것을 동수의 여성으로 교체하고 언론의 자유를 말하며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박수와 감동이 일었다.
미국처럼 노예제를 둘러싼 강력한 충돌은 없었지만, 백인 주류의 사회에서 흑인이 유입되고 이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이 이해와 환대로 변화하는 순간은 멋진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밖에 말할 수없다.
3 시즌의 영상은 각 편마다의 스토리 라인에 배치된 적절한 복선과 긴장감을 광대한 캐나다 대륙의 자연미에 펼쳐놓았다.
시즌 3에 접어들어서 나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길버트의 흑인 친구 세바스찬이 다 큰 아들을 둔 여인을 아내로 맞아 청혼하는 과정도 그랬고 그런 아내가 예쁜 딸을 낳고 바로 죽음으로 이르는 상황도 서글펐다.
늘 백인의 틈바구니에서 눈치 보며 경멸된 삶을 살다가 드디어 친구와 같은 백인 길버트의 동네에서 평화로이 살게 되었는데 말이다. 돌도 안된 딸을 남기고 떠나야만 하는 엄마의 깊은 슬픔이 내게로 깊이 전해져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다 비통함에만 잠기지 말고 딸에게 서신을 남기라는 앤의 제안은 현명하고도 깊은 혜안이었다. 이웃들도 부활절을 맞아 그 흑인 부부를 자기들의 커뮤니티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은 동등하며 그 상하를 논할 수 없는 시대로 개화하고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인디언 원주민의 땅을 강탈하고 몰아내서 그들을 개화시키고 가르쳐야 한다는 명목으로 가두고 잔인하게 몰아붙였던 강탈자에게 작가는 묻는다.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유럽인이 다른 대륙의 사람을, 강자가 약자를, 남자가 여자를......
종교의 축복을 가장한 정복과 부의 축적이 신이 원하던 인간의 모습이었는지를.......
문학이나 영상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세계관과 철학이 자연스레 녹아든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다.
작가가 자연스럽게 풀어낸 씨줄과 날줄의 구성에서 경외감이 인다.
계몽적이되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앤과 길버트의 엇갈리는 사랑과 감정이 극적인 순간에 행복으로 연결되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의 삶은 또 다른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앤의 시리즈는 책으로는 이미
여러 권으로 나와서 인기를 끌었었다. 영상의 감동에 이어 나 역시 책을 주문했다. 표지가 산뜻하고 화사한데 활자가 크고 판형도 마음에 든다.
딸이 물었다.
“넷플릭스로 영상을 봤으면 됐지 책은 또 왜 사요?”
아내가 샀던 우리말 버전에 이어 영어 버전을 주문한 나에게 의문 반 핀잔 반 섞인 어투로 물었다.
“음....., 책으로는 어떻게 표현하고 전개해 나갔는지 궁금해서......”
빨간 머리 앤 한글판과 영문판
영상 초반부의 전개는 책의 구성과 대사를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듯했다.
앤이 처음부터 자기 부모님이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영상에서는 좀 다르게 극적으로
재구성했음을 알았다.
궁금증이 증폭되어 노바스코시아와 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의 주변을 구글맵으로 찾아본다.
'여름휴가라 시간도 많으니 써칭이나 좀 해뒀다 코로나에서 벗어나면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