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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Sep 17. 2021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굽어 보다

일출과 운해의 한가운데서

해발 1300 미터 지리산 왕시루봉에서의 야영은 의외로 안온했다.

텐트 바닥엔 메트를 깔아 냉기를 차단하고 침낭으로 한기를 막으니 찬 공기는 정신을 맑게 했다.

짙은 어둠이 내려 사위에 별빛이 초롱할 무렵 한순간에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다.

노고단을 촬영하고 곧바로 왕시루봉을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차량과 헬기를 번갈아 탄 덕이었지만, 1200 고지의 헬기장에서 1300 고지의 왕시루봉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어깨에 짐을 앞뒤로 매고 트라이포트 장비를 올린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상당했다.

육중한 걸음을 힘겹게 한 발씩 떼고 몇 번을 쉬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텐트 안은 그야말로

천국일 수밖에 없었다. 

혼절하듯 수면에 들어서 동이 트기 전인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축축하게 젖은 텐트의 바깥면을 저치고  어두운 주변을 살피며 서둘러 촬영장비를 챙겼다. 

대략 귀동냥으로 얻은 일출의 포인트를 찾아 낯선 길을 헤쳐 나갔다.

여명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지만, 어둠 속에서 수풀을 뚫고 향방 없이 걸음을 내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산중에 길을 잃고 헤매는 고립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렵게 오른 산에서 일출의 순간을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더 컸다. 

키 큰 나무와 빽빽한 수풀 사이를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확 트인 능선이 나타났다. 

정상에 서니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한줄기의 여명과 새벽 시린 기운에 바짝 웅크려 지면에 깔린 구름바다를 보았다. 

섬진강 줄기 위에 솜사탕처럼 응축되어 내려앉은 운해가 산맥과 지리산 봉우리들 사이에 떠서 매혹적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왕시루봉에서 본 일출과 운해


산과 강을 감싸고 점차 상승하기 시작하는 운해의 바다와, 여명이 가세해 수시로 변하는 빛깔의 마술에, 명징한 공기와 새소리가 더해지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황홀했다. 

전에도 종종 떠오르는 일출을 담고자 산의 정상에 오르곤 했지만 이만한 날씨와 뷰포인트에 서있어 보지 못했다. 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면서 낮게 내려앉았던 구름이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며 하늘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아래로 숨어있던 마을이 보였고 섬진강의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자연의 조화로운 신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를 태웠던 헬기


지리산의 고지대인 노고단과 왕시루봉 정상에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한 유적이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한반도의 복음화를 소명으로 삼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아왔던 외국인 

선교사들.

‘조선에서 일제의 강점기를 거쳐 힘겨운 독립에 이은 전쟁, 분단의 소용돌이와 이념의 혼란 속에서도 이 나라를 벗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병을 피해서, 때로는 삶의 재충전을 위해서......

자신의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 보다 낮은 곳을 찾아 

담대히 나서고 사람을 섬기며 전하려던 신앙과 믿음.

훼파된 돌들과 삭아서 내려앉은 고택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예배당의 흔적과 고택

 

나의 소명은 영상을 제작하는 일이니 다시 카메라를 켰다.

스러져가는 목조 건물과 운해를 배경 삼아 바이올린 주자의 연주를 담아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선율이 명징하고 묵직하게 메아리쳐 번졌다.

깊은 울림이 마음으로 요동치며 흘렀다.  




                                                           바이올린 연주자(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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