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만이 답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냥 답이 없는 것뿐인데

by 에킨

10년가량 알고 지낸 친구가 퇴사 후 영국으로 워홀을 간다.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영국에서의 삶을 현실로 만들 날이 열흘도 채 안 남은 것이다. 이 녀석 외에도 영국에서 워홀 중인 후배가 한 명 더 있긴 한데, 사실 영국으로 간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기후도 엉망이라 맨날 피시 앤 칩스나 먹고 허구한 날 기네스 생맥주나 홀짝이며(이건 좋지만)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언제 모를 비에 대비한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우며 살아가지만 난 런던에 산다고 자위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건 내 선입견이 8할이다.


지난주 술 한잔 하면서 물어봤다. 왜 영국이냐고.


그냥 어렸을 때부터 영국에서 사는 게 꿈이었어.


그 친구는 현답을, 나는 븅딱 같은 질문을 한 거다. 왜가 어딨냐. 우리는 혐오하는 것들은 이유가 명확한 반면, 로망으로 삼는 것들은 대게 구체적인 이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본능에 따른 직관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난 그 속에서 이유를 찾고 앉았으니 얼마나 붕같나.


london-bridge-945499_1920.jpg 이 풍경이 일상이 되는 건 좀 부럽긴 하다


내가 하는 일은 일반적인 직장에 비해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며, 동시에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하지만 필드에 머물수록 내가 생각했던 참신한 기획과 재밌는 콘텐츠보다 의자에 오래 붙여놓을 수 있는 엉덩이와 남이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해낼 수 있는 긍지, 그리고 비록 내 머릿속 아이디어는 1% 정도 반영된 기획일지라도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해나갈 수 있을만한 책임 있는 일꾼이 필요한 것 같다. 난 아닌데. 쥐꼬리만 한 돈 주는 업계치곤 바라는 게 많아 보이지만 당황스럽게도 젊은 친구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 고용주의 고자세가 이해는 간다. 남의 돈 벌어먹는 건 원래 더럽고 치사하다.


존버면 될 줄 알았다. 용은 안돼도 이무기로써 기미는 보일 줄 알았는데, 개천이 겁나게 커서 애초에 탈출이 불가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건 아닐까. 트루먼은 마지노선이라도 있었지, 이건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 달리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people-1492052_1920.jpg 사실 트루먼은 꽤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굶어 죽을 확률이 0% 였으니. 세트장을 나와도 스타다.


내 삶에서 꾸역꾸역 버텨오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다. 6월을 끝으로 모든 걸 내려놓게 된다. 족쇄를 풀고 나와의 허심탄회한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존버가 답이었다면 이런 짓 안 하고 얼마나 좋았겠냐만, 암만 봐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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