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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Jan 22. 2019

콜센터 퇴사를 보고하며

(2018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입버릇이 됐다. 오래 함께한 동료들은 내게 입사 1년 차 때부터 관둔다는 소리를 하더니 5년이 넘게 다니고 있다고 놀린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모아둔 돈도 없고 이직 준비도 못 했지만 무조건 그만둘 거다. 마음 약한 내가 또 은근슬쩍 퇴사를 미룰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연초의 결심이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


퇴사를 한 달 반 남겨놓은 오늘 점심을 먹고 들어왔는데 팀장이 보낸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센터장이 내게 할 말이 있으니 가보라고 했다. 센터장이 상담원을 찾을 때는 업무나 급여체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고 알려주는 게 대부분이라 그의 부름이 반갑지 않았다. 퇴사가 머지않은 지금은 센터장도 무섭지 않다. 자리로 찾아가 또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는데 뜻밖의 얘기를 했다. 최근 많은 콜센터에서 시도하고 있는 채팅상담을 도입할 예정인데 내가 경력도 오래되고 꼼꼼하니 선임 상담원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콜센터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전화상담보다는 메일이나 채팅상담이 스트레스가 덜하다. 전화상담은 목소리, 말투, 억양으로 고객의 생생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돼서 상담원의 마음을 힘들게 한다. 고객이 억지를 쓰고 진상을 부리는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키면서 침착하게 즉각으로 응대를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반면 메일이나 채팅상담은 고객의 감정이 상담원에게 전달되는 게 전화상담보다는 간접적이고, 답변하는 것에도 여유가 있다. 예상치 못한 제의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퇴사 후에 뭘 먹고살아야 할지 걱정했었는데 몇 달만 더 해보면서 이직 준비를 할까?', '아무래도 전화받는 것보다는 편할 텐데... 좋은 기회가 아닐까'.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답을 못하는 내게 센터장은 자기가 많이 도와주겠다며 한 번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콜센터 일에서 큰 가치를 찾지 못했다. 일의 문제인지, 일을 대하는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입사하고 나서 1년 반쯤 되었을 때 팀장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콜센터 내에 '지원'이라는 이해 못할 운영방침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기업은 쇼핑, 도서, 티켓 상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인데 부서별로 성수기가 다르다. 명절을 앞두고는 쇼핑 콜센터가 바쁘고, 공연이 많은 연말에는 티켓 콜센터가 분주하다. '지원'이란 한가한 부서의 상담원이 간단한 교육을 받고 바쁜 부서에 투입되어 콜을 받는 일을 말한다. 이름만 같은 기업일 뿐 부서별로 정책이 다르고 상담 시 이용하는 전산도 상이하다. 팀도 별도로 운영되고 상담 내용도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다.  상담원 누구도 바라지 않았지만, 응대율을 위해 회사가 결정한 방침이었다.


마침 개학 시즌이라 도서 부서의 콜센터가 불이 났다. 나를 포함한 5명의 티켓 부서 상담원이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도서 상담에 투입되었다. 지옥 같았다. 학교, 학원의 교재가 당일 배송이 되지 않아 자녀가 수업에 문제지를 못 가지고 갔다는 부모님들의 민원이 줄을 섰고, 파손과 분실, 반품에 대한 항의도 넘쳐났다.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난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든 점은 도서 지원 자체를 납득하지 못한 채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었다. 티켓 부서의 상담원으로 입사한 내가 왜 다른 부서에 지원을 나와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팀장에게 따지고 화도 냈지만, 그도 완강했다. 아마 더 위에서 결정한 일이라 그랬을 거다. 결국 몇 주간 도서 지원을 하던 도중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에 팀장과 면담을 신청했다. 도서 지원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던 불만을 전하며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나를 빤히 보더니 일주일간 생각해보고, 그래도 퇴사할 마음이 있으면 그때 얘기하면 퇴사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욱하는 마음에 퇴사하겠다고 질러댔지만, 속으론 나를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콜은 많이 못 받아도 관리자와 주변 동료들에게 성실하고 일 잘하다고 평가받던 내가 그만두겠다고 나오면 도서 지원을 빼주거나 다른 제안을 할 거라고 기대했다. 팀장이 퇴사를 만류하면 마지못하는 척 받아주려고 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그때는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내게 전혀 미련이 없어 보이는 팀장의 태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가 떠난 자리는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퇴사할 마음의 준비가 안돼 있던 나는 일주일이 지나고도 말을 하지 않았고, 아무 일 없는 듯 아직까지 다니고 있다. 그 이후로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동료에게는 자주 했어도, 관리자에게 퇴사 얘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뭐라도 된다는 착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나이가 들어도 자기 객관화는 여전히 어렵다. 아니면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지는 걸까.


센터장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달까지만 일하고 퇴사할 계획이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그만두지 못하면 앞으로 5년, 10년은 이곳에 묶여 지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였다. 지난 5년처럼 또 언제든 바꿔 채워놓을 수 있는 기계부품,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나이 들어갈 나를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리에 돌아와서 전화를 받는데 팀장이 다음 달 말에 퇴사하는 것으로 보고하면 되냐고 물어왔고 그렇게 하시라고 답했다. 옆자리의 진희 누나가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어서 센터장이 불러서 퇴사한다고 얘기한 일을 말했다.


콜센터는 말이 빨리 돈다. 여기저기서 정말 그만두는 거냐고 묻는 이가 많다. 매년 양치기 소년처럼 퇴사를 번복하던 내가 정말 회사를 떠난다고 하니 다들 놀라 한다. 잘 결정했다는 동료, 그만두고 나서 이 지긋지긋한 콜센터 근처는 발도 붙이지 말라는 동료, 몇 달 쉬다가 다시 돌아오라는 무서운 농담을 하는 동료, 이제 정을 떼야겠다며 말 걸지 말라는 동료까지 반응이 제각각이다. 센터장, 팀장에게 말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동료들에게 말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정말 그만두는구나. 12월 1일이 되면 '이달 말일까지만 일하고 퇴사하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마음에 안 들게 퇴사를 보고하게 됐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어쩌면 앞으로 남은 한 달 반이 몹시 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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