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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Jan 24. 2019

조금 우스운 이야기들

1. 공연 티켓을 판매하는 콜센터라서 전화 예매가 중요한 업무다. 예매할 때 고객의 성함을 입력하는데, 예매 완료 후에는 성함의 변경이 안되기 때문에 한 글자도 틀리면 안 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고객의 성함을 한 글자씩 단어에 빗대어서 확인하도록 교육받는데, 예를 들어 고객의 이름이 '지성'이라면 "지혜롭다의 '지', 성공하다의 '성' 맞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또한, 고객이 불쾌하지 않도록 '지혜롭다, 성공하다'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성이 '전'인 고객이 전화예매를 요청했는데, 전화를 받은 신입 상담원이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전두환의 '' 맞습니까?"라고 물어서 고객이 크게 화낸 일이 있다. 일하다 보면 예시를 들 단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전화받은 고객의 성함이 'OO걸'이었는데, 처음 두 글자는 제대로 확인했는데 마지막 '걸'자가 계속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생각해낸 게 하필 '걸레'였다. 차마 걸레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어서 "걸.. 걸... 걸 맞으시죠...?"라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고객이 "네! 걸레 할 때 걸이요!"라고 말해줘서 내 속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2. 업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전 9시쯤이었다. 인입되자마자 중년의 여성고객이 고상한 목소리로 "오메기 좀 예약하려는데요"라고 말했다. 속으로 공연 티켓 판매하는 콜센터로 전화해서 아침부터 웬 오메기떡을 찾나 싶어 웃겼다. "고객님, 오메기떡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뮤지컬, 연극, 콘서트와 같은 공연 티켓을 판매하는..."이라고 설명하는데 "오메기떡이 아니고요!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오메기!!"라고 고객이 소리를 질렀다. 뭔가 이상해서 공연장명으로 검색해보는데 <오네긴>이라는 발레 공연이 떡하니 나오는 게 아닌가. 잘못 들어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얼른 예매해드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오네긴'을 '오메기'로 잘못 알아들은 내가 정말 부끄러웠다.


내 고향이 제주도가 아니었다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까


3. 연극의 할인을 묻는 중년의 남성 고객에게 친절하게 안내드리고 전화를 끊는데 옆자리 누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너 방금 고객한테 반말하면서 싸우지 않았어? 무슨 일인데?"라며 내게 물어왔다. "말 안 했는데? 고객도 매너 있고 단순문의였는데..."라고 대답하며 모니터를 보는데 제목이 <여보 나도 할말 있어>인 공연의 예매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 <여보 나도 할말있어> 말씀이십니까?"라고 공연명을 확인하는 것을 옆자리의 누나는 내가 고객에게 "나도 할말 있어"라고 반말한 것으로 잘 못 들어서 얘가 잠시 미쳤는 줄 알았다고 했다.



4. 유치하지만 말실수가 가장 웃기다. 어르신들 중에 공연명을 조금 다르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빌리 엘리어트>를 <엘리 빌리어트>로, <웃는 남자>를 <우는 남자>로, <바넘 : 위대한 쇼맨>을 <쇼맨 : 위대한 바넘>으로 말한다. <친정엄마와 2박 3일>이라는 공연은 <친정엄마와 1박 2일>, <시어머니와 2박 3일>로 바뀌어서 제대로 불려지는 경우가 더 적다. 이제 적응이 돼서 웬만한 실수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데 가끔 웃음이 터져서 곤란할 때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랐던 고객의 실수는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오래 공연하기로 유명한 싸이의 콘서트 <올나잇 스탠드>였다. "싸이 공연 티켓 남아있는지 확인 좀 하려고요. <원나잇 스탠드> 인가?"



5. 원래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는데 콜센터에서 일하며 더 늘었다. 조금만 들어보면 고객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힌다. 예매 페이지를 검색하거나, 전화예매를 해드릴 때는 정확한 공연명을 알아야 하는데, 간혹 공연명을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로 연락 주는 고객이 있다.


"번개 파워 티켓이 얼마예요? → <번개맨과 블랙홀 대모험> 공연의 티켓 금액은..."

"그 마술쇼 있잖아요 → 이은결, 최현우 중 어떤 공연 말씀이세요? → 이은결이요"

"서커스 어디에서 합니까? → 태양의서커스〈쿠자〉..."

이런 식으로 척하면 척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게 한 일이 있다.


"그 뭐더라.. 매일 싸우는 아저씨들 있잖아요~"

매일 싸우는 아저씨가 뭐지. UFC나 로드 FC 경기 티켓을 판매하기도 해서 격투기 경기인 줄 알았다.

"어떤 싸움... 혹시 격투기 경기 티켓 말씀이신가요?"

"아니 아니.. TV 나와갖고 매일 싸우는 아저씨들 있잖.. 그 뭣이냐..."

내 머릿속은 이미 격투기 밖에 없었다. 홈페이지 스포츠 카테고리를 계속 아보던 중에 고객이 소리쳤다.

"아 맞아! 태진아하고 설운도 공연 말이여!"

"<송대관VS태진아 라이벌콘서트> 말씀이시죠...?"


고객이 제대로 알려줘도 못 알아듣기도 한다. 유창한 영어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결국 스펠링 하나하나 받아서 검색한 적이 있다. <CHARLOTTE DE WITTE>라는 공연이다.


6. 수화기 밖의 고객이 어떤 화를 낼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전화를 받는데 가끔 긴장을 허물어뜨리는 순수한 고객이 있다. 20대 초반의 어린 고객이었다. 개명을 했지만 홈페이지에는 개명 전 성함으로 가입되어 있어 이름 변경을 원하는 고객이었는데, 회원 정보상에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고객센터에서 변경을 해드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나 같은 일반 상담원은 할 수 없고 콜센터 내의 회원정보 담당자만 처리가 가능한 업무였다. 성함 변경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고객님께 안내를 드리자,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린다면 변경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1시간도 못 기다리냐는 생각에 짜증이 나서 "고객님, 이 건은 회원정보 담당자만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고, 평균적으로 1시간이 소요됩니다. 만약 성함을 변경하지 않으신다면 계속 개명 전 성함으로 홈페이지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고객은 "아... 이름은 변경하고 싶은데요... 직원분이 저 때문에 1시간이나 고생하시는 거면 너무 죄송해서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콜센터 직원이 1시간 동안 계속 붙들고 처리해야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아.. 고객님 그게 아니고, 제가 회원정보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담당자가 확인하고 처리하는데 1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 담당자가 1시간 동안 계속 작업해야 하는 업무는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고객은 안심하며 변경해달라고 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1시간이나 걸려요?", "거기 가만히 앉아서 뭐하는데? 당장 해주세요. 바로!"라며 상담원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은데 상담원을 생각해주는 고객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지난 글을 살펴보는데 하나같이 우울하고 기운 빠지는 얘기들이다. 콜센터의 현실을 전하고, 상담원으로 일하며 내가 겪은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훈훈하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써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아마 콜센터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생기는 지경이 되어버린 듯하다. 5년간의 경험을 뒤져서 꾸역꾸역 웃긴 얘기를 찾아 써봤는데 참 별거 없다. 사실 콜센터에서 웃을 일이 별로 없다. 가끔 만나는 좋은 고객, 함께 고생하는 동료들. 그래도 사람 때문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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