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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Feb 09. 2019

콜센터를 퇴사하며

"주운아, 너 진짜 좋겠다"


퇴근을 준비하는데 친한 수경 누나가 말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회사를 그만두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진상과의 전화를 끊을 때마다 주운이는 이제 이런 고생 안 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했다. 한 달 전 퇴사를 보고하고 나서 정말 힘들었다. 공연이 가장 많은 12월의 이 곳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났는데, 수많은 콜과 민원을 받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역시 콜센터는 끝까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이런 연말을 다섯 번이나 겪어낸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전화예매는 끝이 없고, 배송 지연, 티켓 분실에 관한 문의도 넘쳐났다. 그 와중에 독감까지 유행을 해서 콜이 쏟아졌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수경 누나의 말처럼 '이번 달만 면 여길 벗어난다'는 생각이었다.


신기하게도 정확히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콜이 줄어든다. 바쁠 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한가해지니 퇴사가 실감 났다. 콜센터에 대한 미련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조금도 없다. 아주 홀가분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조금 더 빨리 떠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밖에 없다. 좋든 싫든 5년간 나의 밥벌이였던 이곳을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마음이 나를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곳을 좋아하고, 즐기며 일하기도 쉽지 않다. 가능하긴 할까.


기다려온 12월 31일, 콜센터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여느 날처럼 업무 시작 5분 전에 겨우 도착해 컴퓨터를 켰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콜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배려인지 진상은 없고, 콜도 많지 않아 무탈한 하루다. 18시가 가까워오니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나왔다. 캐스팅 변경 취소를 요청하는 마지막 고객이 인입됐다. 이 고객은 내가 오늘 퇴사한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이 고객에게 '저 오늘 그만둡니다!'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친절하게 취소를 해드리고, 평소에 잘 안 하는 '다른 문의사항은 없으신가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고객은 괜찮다고 했고, 끝인사를 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박주운이었습니다" 아마 수만 번쯤 했던 인사. 다시는 없을 마지막 인사.


18시가 되고 PC에 있는 나의 자료를 모두 깨끗이 삭제했다. 내 자리에는 치울 물건이 별로 없다. 이 날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깨끗하다. 텀블러만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이 회사의 안 좋은 기억과 기운이 들러붙을 것 같아 그랬다. 오래 함께한 동료들과의 작별 인사가 왠지 쑥스러웠다.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닌데 다들 축하한다고, 부럽다고 말해줬다. 동료 때문에 힘든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역시 함께한 동료들 덕분이다. 지긋지긋한 일이었지만 사람은 얻었다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함께 욕해주고, 위로해주고, 술 마셔주고, 시답지 않은 내 개그에 웃어준 동료들이 고맙다.


병진이 형이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진희 누나, 연주와 회사 근처에서 닭 한 마리에 소주를 마셨다. 아주 조용한 마무리였다. 술자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회사가 있는 구로디지털 단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내가 콜센터를 다니긴 했었 싶어 졌다. 조금 전까지 전화를 받던 저곳이 어느새 나와 전혀 관계없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년간 그렇게 바라면서도 결심하지 못한 퇴사였는데, 참 별것 아닌 듯해 조금 허무했다. 자꾸 포장하려는 마음에서 지난 5년을 '버텼다, 견뎠다'라고 쓰게 되는데 사실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의욕도 생기도 없이 먹고살아야 해서 다닌 거다.


그렇게 죽어지낸 시간도 결국 내게 준 게 있다. 그저 숨만 쉬며 산 시간이라도 결국은 내가, 나 스스로 살아냈다는 것. 나를 포기하거나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것. 지난 5년간 나를 가장 힘들게 한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내 인생 망했구나', '나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구나'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자꾸 조급해지고 욕심만큼 이뤄내지 못하는 나를 비난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미움을 조금 덜어보려 한다. 오늘만큼은 지난 5년을 살아낸 나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곳을 그만둔다고 하루아침에 내 삶이 달라지지 않을 걸 안다. 항상 기대가 커서 속상한 일이 많은 나지만,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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