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베트남, 중국, 몽골, 네팔, 태국, 체코,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많은 나라를 밟았다. 단기선교로, 직장 동료와 함께, 나 홀로 또는 가족과 함께.
여행은 늘 설레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의 답답함에서 탈출하는 시간이었기에 그 자유함에서 느껴지는 해방감이 가장 큰 행복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이 다르게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2013년 여름 태국여행에서였다.
결혼을 약속했던 친구와의 이별 후 홀로 떠난 태국 여행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아니, 이미 길을 잃어서 여행을 떠났었는지도 모르겠다.
1. 길을 잃었을 때는 멈춰선다.
혼자 떠난 태국여행. 호텔 조식을 먹으며 흘러나오는 원더걸스의 노바디 노래를 들으며 폭풍눈물을 쏟았고,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도 주저앉아 울었다. 여행 일정 중에서도 유난히 더웠던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넓은 왕궁의 이곳 저곳을 무작정 부지런히 걷는데 내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한 외국인이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지도를 보고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아, 길을 잃었을 때는 잠시 멈춰야 하는구나.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구나.' 그 외국인을 본 후로는 더이상 부지런히 걷지 않았다. 그늘에 앉아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는 지금 새로운 환경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새로운 마음이 필요하구나!'
그 날 이후의 일정은 관광이 아닌 쉼이었다. 호텔 근처의 카페에 가서 하루종일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가고 싶었던 TCDC 도서관을 찾아 가서 그냥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 혼자 떠났던 태국 여행 이후, 나는 더이상 나를 바닥까지 소진시키지 않는다. 무작정 달리지 않는다. 나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기 위해 제자리에 잠시 멈추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여행을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쉼을 배웠다.
두 번째 여행이 다르게 다가왔던 순간은 가족과 함께 했던 유럽여행에서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또 일하던 직장에서 퇴사까지 한 후 일상의 여유를 누리던 시기였다. 부모님 찬스로 가게 되었던 유럽여행이었다. 마음은 즐거우나 10일의 일정동안 일곱개의 도시를 돌아보는 힘든 패키지 일정으로 몸은 피곤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여행과 인생의 진리를 몇 가지 깨우쳤다.
2. 인간은 피조물일 수 밖에 없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진다. 톨레도의 엄청난 절벽 앞에서 감탄하는 일밖에는 할 것이 없었고, 하늘의 구름과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눈으로 보는 자연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사진을 보면서도 감탄사를 연발했던 그 날의 우리였다.
아등바등 살아갔던 그 간의 시간들이 참 부질없게 느껴졌다. 도시의 높은 빌딩과 스마트한 문명들을 누리지만 그 누가 해와 달과 하늘과 별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저런 놀라운 자연을 빚어낼 수 있겠는가. 내가 옳다고 다투고 내가 조금 더 앞서 가려고 경쟁하지만 그 누구도 모두 맞지 않고 그 누구도 모두 알지 못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고 단지 조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뿐이다. 어차피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3. 저들의 일상이 나의 일탈이 된다.
가우디 성당을 보고 구엘공원을 거니는데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청소부 아저씨가 휴지통을 비우고 계시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저 곳도 누군가에게는 일터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순간 깨달았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이거구나. 저들의 일상이 나의 일탈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구나. 그 짜릿함과 희열.
내가 사는 집도 누군가가 일상을 벗어던지고 떠나온다면 바로 이 곳이 여행지가 될 수 있겠구나.
4. 새로움으로 바라보기.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떠난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도로에 즐비해있는 오렌지 나무도 새롭고, 꽃에 앉은 벌도 신비해보이고, 심지어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멋있어 보였다.
지난 주말 남편과 함께 함덕 해변까지 드라이브를 하는데 시골길 돌담 위를 찍고 있는 관광객이 보였다. "아니, 저걸 왜 찍지?" 남편이 이야기하는데 문득 가족과 함께 갔던 유럽여행이 생각났다. "저 사람한테는 다 새롭게 보일거야. 관광지잖아."
그러고보니, 제주도에는 도로에 귤나무가 즐비하고, 우리집 마당에 있는 봉숭아며 백묘국이며 맨드라미에 벌과 나비가 수도 없이 앉았다 날아가며, 함덕 해변까지만 나가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한 풍경일 뿐이다. 이 익숙한 일상 속에서 새로움으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다면 굳이 여행이 필요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