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

어쨌든, 일상

by 단비
20201219_141527[1].jpg 제주의 겨울바다(조천 해안도로)


제주의 겨울은 푸근하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다.


하지만 작년은 달랐다. 몇 십년만에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3년 만에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나름 한파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부족했다. 한파주의보 이틀째 날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당에 있는 수도관이 얼어버린 것이었다.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고, 상하수도 본부에도 전화를 걸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얻을 순 없었다. 릴 선을 연결해 계량기 안의 수도관을 드라이기로 녹여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물이 안 나오니 라면도 하나 끓여먹을 수 없고, 세수도, 손 씻기도 할 수가 없었다. 소변을 보고도 물을 못 내리고, 나와서는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냉동실을 뒤져 데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 끼니를 때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름보일러의 기름이 바닥이 났고, 기름을 시키려고 주유소에 전화했지만 주문이 밀려 하루 뒤에나 배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이참에 자연인 같은 삶을 살아보자며 주어진 환경과 시간을 누려보기로 했다. 주말에는 원래 잘 안 씻으니 불편할 것 없고, 기름이나 아끼자며 보일러 온도를 낮춰놓고 마당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며 체온을 높였다. 오랜만에 두텁게 쌓인 눈을 굴려 철없는 아이처럼 신나하며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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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만드는 나


문제는 다시 집 안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몸은 마음과 같지 않은지라 밖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움직였더니 소화가 되며 신호가 왔다. 하필 이럴때. 이걸 어쩐다. 나는 잽싸게 밖에서 눈을 퍼서 냄비에 담아 녹였지만 퍼온 눈의 반 도 안 되는 적은 양의 물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던 남편이 옆집에 찾아가 물을 얻어왔다. 다행히도 옆집은 미리 정비를 해두어 수도관이 얼지 않았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급한 볼일을 해결했고, 남편은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라디에이터의 온도를 높이고 TV를 시청하며 남편과 나는 “전기마저 끊겼으면 어쩔 뻔 했을까? 이웃의 도움에 감사하다.” 라는 대화를 여러 번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후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며 다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딱 하루 반나절 동안의 자연인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2020년 지난 한 해.

가족과 친구들과의 만남,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거리를 다니던 시간, 반가움에 하던 악수와 포옹, 시끌벅적하던 명절, 크고 작은 축제, 꽃구경 단풍구경, 여름 휴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세계적 팬데믹 현상 앞에서 더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다.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내 눈 앞의 펼쳐진 삶의 불편함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는 하루를 경험했다.


당연하게 여겼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헤아려본다.


이제는 세수를 할 때, 설거지를 할 때 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상수도와 전기가 없던 시절의 불편함을 가늠하며 현재의 편리함을 묵상한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들꽃 같은 부부가 되자고 다짐한다.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에 대해 곱씹으며 '지금, 여기'의 일상을 다시 또 감사로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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