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쓰쿠루 본인에 대해 말하자면, 남에게 자랑할만한, 또는 이렇다 할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꼈다. 모든 점에서 중용이었다. 또는 색채가 희박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중에서
A 역시 쓰쿠루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 대입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내부에서 꽤나 치열하게 자기 검열을 해오던 'A'는 본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둘러본다. 고층 건물의 창문 어디선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인을 관찰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확인하며
엄밀히 말하면 '중용'은 아니었다. 색채가 희박한 건 맞지만
'적절한' 사람이라기 보단 남들과 구분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애석하게도 만인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형태였다.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참으로 다양하고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좀처럼 몸에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을 껴입은 것같이 영 불편했고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이런 고군분투가 개성 없음의 증표로 보일까 티를 내진 못했다. 물아래 의욕적인 발길질과 달리 물 위에 떠 있는 오리의 아무렇지 않은 평온함의 표정을 닮게 되었다. 내부에서 자신을 찾기 어렵자 ‘빵부스러기’ 라도 찾을 수 있을 까하는 마음에 주변의 색채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귀담아듣곤 했다. 원래 잘 들어주던 사람처럼(지극히 가언명령적으로)
생각에 잡아 먹힐 때면 A 역시도 잡아먹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양한 색채 속 흑백 영화의 주인공은 바 테이블에 앉아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작은 밥알을 입 안에서 굴려가며 씹다가 문득 본인을 관찰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살짝 올라간 입의 꼬리와 함께
어느새 중용이 되어버린 맛을 음미하며
*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Ella fitzgerald의 Misty라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