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안드로비치 예프레모프의 생애
<안드로메다 성운>은 구소련의 대표적인 SF작가 이반 예프레모프의 걸작으로, 그가 50세가 되던 1957년에 발간되었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우주경쟁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고, 소련을 구시대적인 농업국가 정도로 치부하던 미국과 서방의 과학계, 문학계는 곧이어 발사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로 인해서 소련이 근대적인 기술산업국가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소련에서 쏘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예프레모프의 소설을 읽고서 50년대 소련의 우주과학기술이 특정한 과학기술자 계층이 아닌, 일반 소설가에게 까지도 매우 깊이 있게 전달되었음을 직감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 나오는 우주 항행학에 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며, 여태껏 어떤 SF소설에서도 보기 힘든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또한 예프레모프는 당시(에서 현재까지) 물리학 이론에 부합되는 선에서 상상의 나래를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과연 어디까지 진출할 수 있는지 가늠하게 해줬다. 서방의 SF소설들은 허구의 <워프 드라이브>, 차원 이동을 주제로 은하계를 종횡무진하는 반면에, 예프레모프의 소설은 마치 물리학처럼 간결하면서도 매우 현실감이 넘친다.
소설의 주인공인 탄트라호 선장 이하 승무원들은 모두 투철한 사명감과 유기적인 연대감을 과시한다. 스타트렉류의 미국식 우주 SF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오히려 탠트라호의 승무원들 같은 이들이 우주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을 희생하고, 범인류적인 사명감에 넘치는 영웅들의 모험담은 소련의 소설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또 다른 볼거리이다.
은하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은하통신망>의 일원에 속하게 된 미래의 인류는, 다른 문명과의 교신을 통해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차츰 우주에 진출한다는 줄거리인데, 이것은 1960년에 시작된 SETI 프로그램이 외계 종족과 처음 통신을 시도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선 매우 진보적인 아이디어이다. 가상의 엄청난 에너지원을 이용해서 광속에 가깝게 날아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든 인류가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우주선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점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러한 시간 흐름의 불일치로 우주선 승무원들이 겪게 될 문제점도 어느 정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소련인 답게 개인들의 영웅적 희생을 추앙하면서, 서로 앞다퉈서 미지의 우주로 떠나간다. 중앙 통제되는 사회답게 수십 년마다 한 번씩 발사되는 탐사대에 대해, 수백 년간 지속적이고 연계성 있는 전 지구적인 지원도 묘사되고 있다. 흔히 서방세계 소설에서는 이런 거대한 사업에 대한 국가 간 이견, 기업들 간의 갈등, 내부 구성원들 간의 인적 갈등이 주로 등장하는데 반해, 예프레모프는 그런 번잡하고 거추장스러운 지표면적인 발상은 깡끄리 무시한다. 오로지 모든 인류는 우주로 진출하는데 사활을 걸고 일사불란하게 우주 개척을 시도하는 이상적 여건에 놓여있다.
이런 소련 스타일의 다소 생소한 세계관과 달리, 소설 내에서 묘사되는 항성 간 항해는 매우 사실적이다. 어떤 별에 도착해서는 반드시 가속한 만큼 감속해야 하는 점이나, 질량이 무거운 별에서는 근접해서 위성궤도를 형성하기 더욱 어렵다는 점, 위성궤도를 일단 돌게 되면 다양한 궤도를 선택해서 별의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 점도 묘사되고 있다. 아직 인공위성 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매우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 역시 우주개척의 아버지 <치올코프스키>의 나라답게, 우주과학기술에 대한 기초이론이 매우 탄탄했던 배경이 도움됐으리라.
미지의 우주 생물과의 혈투, 미지의 행성에서 발견한 고대 우주선의 정체... 이 모든 것은 현대에 영화화되고 있는 최신 트렌드의 우주 SF 영화들과 매우 흡사하다. 낭만적인 우주개척 스토리의 60~70년대 서방 SF에 비하면, 매우 현실적이며 과학적 추론에 따른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안드로메다 성운>의 세계관이 집단주의나 초국가주의에 가깝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은 21세기에 쓰였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가치가 돋보이는 흥미로운 소설이라 평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1967년에 구소련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구할 수 있다면 한번 꼭 보고 싶다. 명작 SF소설들은 20세기 초반에 집중적으로 많이 탄생했다. 하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은 그런 기존의 명작 SF 소설들에 비해, 또 다른 방향에서 꼽을 수 있는 리얼리티 SF소설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만약 영화 <그래비티>, <마션>, <인터스텔라>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고전 영화가 되어버린 <안드로메다 성운>도 한번 찾아보시라. 조금 난해하다는 평이 있지만, 소설과 또 다른 맛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다른 매체에서 <그래비티>의 옥에 티, <마션>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매우 긴 글을 통해서 평론했던 일이 있다. 물론 일반적인 영화 평론가의 시선이 아닌, 어디까지나 실제 우주비행사들의 관점에서 평론한 것이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안드로메다 성운>의 세세한 기술적 묘사에 대한 평론도 해보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광속 우주선이 거대한 중력원 근처를 비행하게 될 때 겪게 될 난관에 대해서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예프레모프는 아마도 구소련의 실제 우주물리학자들, 관련 기술자들과 매우 폭넓게 토론하면서 이 소설을 써나갔을 것이다. 그런 풍토가 너무나 부럽다.
일각에 알려진 것처럼 예프레모프가 투철한 공산주의 신봉자였음은 소설을 통해서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봉하는 공산주의는, 우리가 흔히 <빨갱이>라고 부르는 그런 존재들의 사상이 아니다. 오로지 원시 사회처럼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고, 영웅을 추앙하는 그런 원초적인 이상론에 가깝다. 정작 예프레모프 자신은 그런 문학적 곤조로 인해 차츰 현실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결국 소련 당국에 의해 숙청되었다고 한다.
동서 진영을 막론하고, 자신만의 문학세계에 고집하는 이들은 정치집단의 배척을 받기 쉽다. 그나마 서방 세계의 몇몇 국가들은 사상의 자유, 문학창작의 자유를 인정하므로, 그러한 곤조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돌아보라. 구소련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환경으로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차라리 구소련은 책이라도 많이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