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설명할 때, 내가 만든 것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어릴 적 본 어린이 잡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아이가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 문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아, 이때만 해도 도어록보단 열쇠가 많았어서 아이 스스로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집에 계시던 아버지가 문을 안 열어주시고
“넌 누구냐? 누군지 말해야 들어올 수 있다.”
이러시는 거다.
당황한 아이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나열하기 사작한다.
몇 년 몇 월 며칠 어디서 태어나 이름은 부모님께서 무슨 뜻으로 지어주셨으며,
지금은 무슨 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다. 이런 식이었다.
그 말을 듣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셨다.
“그 정보는 네게 주어진 정보지 네가 만든 정보가 아니잖니.”
물론 유전자 검사나 주민등록증 검사 등으로 진짜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이야 가능하지만
이 이야기가 던지는 물음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 중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있는가에 있다.
대학생만 되어도, 그나마 학과를 대며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기에 이 전공을 선택했다는 말이 가능하지만,
의무교육을 받는 나이에는 내가 선택한 무언가로 나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예전엔 자유학기제 같은 제도도 없었으니, 짜인 시간표대로 짜인 진도에 맞춰
주어진 교육을 받으며 주어진 정보대로 사는 것이 정말 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나”를 규정하는 모든 기준은, 공부와 진로일 경우에만 그런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동의만 했다면, 어쩌면 독자분도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좀 많을 수도 있겠다.
파란 하늘을 좋아한다거나, 학교 축제 때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불렀던 추억이라던가 따위의 정보가
그 나이에도 내가 스스로 정한 나에 관한 정보로 자리 잡아줄 수 있다.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어도, 진로와 관련되지 않더라도 나를 이루는 소중한 정보가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를 표현하는 정보 중, 내가 스스로 정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은,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고 내가 재수생이 된 시절까지 이어진다.
실패가 부끄러워 숨어버리던 때,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시기가 맞물렸다.
어쩌면 덕분에 다시 무언가를 도전할 계기를 얻은 걸지도 모르겠다.
나를 표현하는 것 중에 내가 스스로 지은 “이름”을 먼저 내세우고 나를 소개하는 것.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자 어서 대학생이 되어 사회로 진출하고 싶어졌다.
바다를 담은 이름으로. 나중에 해상도시나 해저도시가 생기면 제1대 시장을 해보고 싶었다.
다른 누구보다 바다를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항상 자연을 정복한 뒤에 자연과 공존하려고 했다.
공존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바다에 발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무언가로 돈을 벌까, 어떻게 나를 드러낼까 하는 것보다
더 원대한 무언가가 마음에 자리를 잡으니
직업과 진로도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분량을 못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