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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다 쓸 때까지 쏟아보자

뜬금없이 돌아온 계기

by 바다별 Mar 26. 2025

담배맛 팝콘


조금 비위가 상할 수 있는 이야기라서 조심스럽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하려면 꼭 언급해야 하는 소재다.

며칠씩 밥을 안 먹고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저번 글에 말했던 것처럼, 지지직거리는 화면을 통해 보는 세상은 내가 걷는 길이 인도인지 차도인지도 헷갈리게 만들었다. 차에 치일 뻔하다가 경적 소리에 정신이 잠깐 들고선, 이대로 죽지 않으려면 무슨 방법이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는 길에 영화관 건물이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인지 누구인지, 팝콘이 가득 담긴 봉투를 가지고 나와서 쓰레기장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갔다. 쓰레기장엔 그런 팝콘 봉투가 몇 개 더 있었다. 아마 팔리지 않은 팝콘과... 영화관 바닥에 흘렀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진 팝콘들이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팝콘의 맛이 알던 맛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버려진 팝콘을 먹었다. 생각했던 맛이 아니어도 노랗게 변한 시야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맛을 느낄 새가 없이 배부터 채우고 싶은 입장에선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그 맛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담배맛이었다. 이것저것 다 섞여있어도 담배 향은 이길 수가 없었다. 담배가 그렇게 강하고 독한 물질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느꼈다.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영화 삼아 팝콘으로 배를 채우긴 했으나, 몸에 제대로 영양소가 들어간 느낌은 아니었다. 허기를 느끼니 먹을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이제 좀 위생도 따질 만큼의 허기가 되니 다시 그 팝콘을 먹으러 가기는 싫어졌다. 그렇게 밤새 또 걸었다.


레미제라블


당시에 영화관에서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흥행했다. 그 영화가 그냥 생각이 나서, 어느 새벽, 십자가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냅다 문을 두드렸다. 골목길 사이에 있던 작은 교회였다. 새벽 4시쯤이었나, 사람은 없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힘은 없어서, 그냥 그 앞에 앉았다.


시간이 좀 지났나, 어떤 남성 한 분이 열쇠를 들고 와 교회 문을 열고 계셨다. 나를 발견하시곤 무슨 일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쪽팔린 것도 몰랐다. 그냥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분이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교회 안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뭐 간단히 빵이라도 얻어만 먹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교회는 신기하게도 안에 주방이 있었다.


육개장 한 그릇이 나왔다. 요리를 잘하시는 목사님이라니, 교회가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얻어먹었다. 못 알아보기 힘드셨겠지만, 집을 나온 것을 아시고는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답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계속 있으면 경찰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돌아가기보단 방황을 이어가길 택했다.


생각보다 살만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기 때문이다. 방황 기간 중 생존을 위해 세운 전략과 아르바이트를 얻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혹여 이 글을 보고 집을 나가 살 계획을 하는 아이가 있을까 해서다. 아무리 싫더라도 주어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참을 수 없다면, 도움을 줄 어른을 찾거나 없다면 내게 연락해 주길 바란다.


내가 버린 신에게 사랑받는다 느꼈을 때


신앙 때문에 방황하게 되었는데, 신앙 때문에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전 글에서 신앙이 무너진 계기를 '신의 무능력함을 느끼게 되었을 때'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신을 믿어온 인생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집을 나가 마음대로 살며 무능력한 신 대신 나를 믿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잘 살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더 살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순간이 있었다. 나 스스로 살아가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느꼈을 때다. 이 이야기 역시 자세하게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것 자체가 남에게 민폐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차라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겨울날 새벽 길거리에서 몸이 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감고, 정말 주마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던 그 순간에, 누군가 나를 깨우는 음성을 들었다. 그렇게 편히(?) 눈 감지 못하고 눈을 뜨게 되었으나 웬걸,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느낌은 생생한데, 그게 실제였는지 생생한 꿈이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여하튼 나를 누군가가 깨웠다는 느낌 속에 더 이상 눈을 감고 있고 싶지가 않아 졌다. 그 자리에서 앉아서 생각을 좀 했다. 나를 깨운 존재가 신적인 존재라면, 내가 지금껏 계속 부정했던 그 개신교의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려나? 하지만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 해도, 자신을 계속 저주해 온 한 인간이 지옥으로 가는 걸 굳이 구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능력이 아닌 사랑 때문에 신이라 불린다면?' 그러니까, 사실 자신을 저주하는 존재라도 얼마든지 사랑해서 살리고 싶어 하는 존재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신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앞뒤가 맞게 된다. 아무리 자신을 미워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버리지 못할 만큼 사랑한다면, 그런 사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느낌이 내 마음에 넘치게 되었다.


가설, 그리고 행동 개시


어떤 논리적 증거도 없는 생각의 나열을 마치고 나니, 이를 무슨 수로 맞다고 증명할지에 관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정말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지가. 그래서 우습게도, 방황을 이쯤에서 끝마치고 돌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 한 가지 가설을 설정한 후에.


만약 내가 경험한 것이 신적인 존재가 맞고, 그 신적인 존재가 내가 생각한 그 신이 맞다면,

그 신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가보자.

그리고 내가 넘치게 받은 이 사랑을 한번 돌아가서 다 쓸 때까지 쏟아보자.

쏟을수록 고갈된다면, 신적인 존재의 유무를 따지든, 다른 신을 찾든 가차 없이 떠나 다른 길을 찾아보자.

고갈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멈추지 말자.


그렇게 돌아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사역의 길로 들어선 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시간, 12년이 흘렀지만,

고갈된다는 느낌보다는 여전히 아직도 넘쳐흘러서 바닥에 흐르고 있는 사랑도 다 못 주고 있는 나를 보니,

내가 선택한 길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더 열심히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갖기도 한다. 만약 붙잡고 있는 그 기둥이 우리 어른의 시선에서 볼 때 무너질만한 기둥이라면, 진지한 인사를 건네고 새로운 기둥을 세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뜨겁게 사랑했다가 잃었던 경험을 한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위로자가 되기 쉽다. 이미 다 잊고 살았던 기억 속 어두운 나의 과거를 꺼내기란 쉽지 않지만, 아이가 나보다 더 짧은 방황기를 가지길 바란다면 과감하게 나의 어두운 모습을 꺼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그 어두운 시기를 극복한 어른이라는 소리일 테니까. 분명 아이에게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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