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방향 설정으로 숨어버리다
대충 하려면 끝도 없이 대충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진로 상담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하는 방법은 이렇다.
1. 성적표 보고 잘하는 과목 못하는 과목 구분 짓기
2. 잘하는 과목과 관련된 학과를 추천하고, 대학별 입시 결과가 나열된 표를 제시하기
3. 목표 학과와 대학이 정해지면, 더 알아볼 새도 없이 어떤 전형을 준비할지 알아보기
*아, 다 잘하는 친구들은 의대나 법대를 추천한다.
그렇게 정해진 전형에 따라, 수많은 학생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경쟁을 시작한다.
18살, 집을 나갔다 돌아온 후, 사랑과 열정은 가득했다. 이제 뭘 하고 살면서 사랑과 열정을 쏟을지 정해야 했다. 학교에서 진로 상담을 담임 선생님을 통해 받았다.
과목으로 따지면 생명과학을 제일 잘했고, 나머진 비슷비슷했다. 이럴 경우 추천 전공은 생명이 들어가는 모든 전공이 된다. 따라서 생명과학 전공, 아니면 생명공학 전공을 추천받았다.
동물이나 자연 관찰이 취미니 잘하는 과목을 마침 좋아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쪽 계열이었고, 생명과학 같은 순수 과학보다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생명공학으로 추천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잘하는 것을 바탕으로 진로 계획을 세우고 나에게 맞는 전략을 세워 입시 경쟁에 뛰어들기. 우리 대부분의 학생들이 세우는 입시 전략이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큰일 난다 그러면.
우선, 잘하는 것을 전공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잘하는 것은 직무라고 규정짓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야구를 잘한다고 해보자. 물론 오타니는 던지는 것도 치는 것도 잘한다. 하지만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지 않더라도, 타격을 충분히 잘하는 타자라면 우리는 그를 야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잘 한 다는 것은, 한 전공, 한 직업에서 요구하는 모든 역량을 갖춰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강속구를 못 던지더라도, 집중해서 공을 보고 팀이 필요할 때 적절히 공을 쳐낼 수 있으면 된다.
잘하는 것은 야구가 아니라
위기에도 긴장하지 않기, 순발력 발휘하기, 적절하게 힘 빼기 등 세부적인 영역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가?
공식을 암기해서 성적이 좋은지
논술형 답변을 잘 써서 성적이 좋은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언어 능력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진짜 수학을 잘하는 학생 중에는 수학을 하나의 언어처럼 받아들이는 학생도 있으니까.
나는 내가 추천받은 생명공학 전공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이 있었으니 내가 잘하는 것을 이 열정을 가지고 하면 가장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적이 잘 오르지 않을 때부터 느끼긴 했다. 내가 이 진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다른 것들을 더 알아볼 새가 없었다. 나는 제일 잘하는 과목이 있었고, 그 과목을 통해 진로를 설정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지금에서야 돌아보게 되며 얻은 결론은
나는 생명과학이라는 과목이 가지는 특성,
즉 다양한 분야를 흐름대로 비교적 얕게 공부하고
대상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부하는 것을 잘했던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야는 어쩌면 다른 분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수를 하게 되었고, 내가 평소에 받던 성적과 공부하는 태도 등을 알던 친구들 앞에 내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졌다.
잘하는 것을 했는데 최상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그리고 내가 더 노력했어도 지금보다 나을 거란 보장이 없다는 그 사실이 나를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재수를 하게 된다.
재수를 하면서 진로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