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May 30. 2022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

에세이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은 우리 가족 특유의 세계를 인식하는 세계관이자 가족관이며 인간관이었다. 대대로 저주처럼 흘러 내려오는  가족 내부의 세계관은 당연하게도  인물들을 외롭고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는데 우리는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탓인지 무엇이 선행된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했다. 인식이 결과를 만든 것일까? 결과가 인식을 만든 것일까? 대대로 유전병처럼 전해지는 어쩌면 강박적인 외로움으로 비롯된 존재론적 인식은 우리 안에 살아서 서로를 한편으로는 갉아먹고 한편으로는 유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와 엄마의 관계는 유대보다는 서로의 마음 한켠을 갉아먹는 기생충과 비슷했다. 그러니 나는 가족이란  그다지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같다.


 뱀파이어 가족이라도 되는   저주받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그러나  지상명령에 필사적일수록 저주의 늪에 발목을 잡혀 아래로 아래로 침잠한다는 사실을 알게  것은 내가 어른이 되고  후였을 것이다. 내가 행복에 대한 역치는 높지만 우울에 대한 역치는 너무 낮은 탓일까? 아니면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이 지닌 존재감이 훨씬 커서일까? 나는 오히려 가정을 제대로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가족 구성원들을 돌연변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불행히도 돌연변이가 아니었고 역시 가족들 사이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뽐내는 인간  하나였다. 어째서일까? 사회에서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의 존재감은 너무 작고 먼지 같아서 신경  겨를도 없이 희미해지는데 가족 내부에서는 그토록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걸까?


 나는 이 유전적 저주에 대해 혐오를 가진 사람이었고 이 지상명령에 합당히 부응하는 것은 20대 후반부를 장식할 피날레였다. 놀랍게도 나는 이 지상명령을 반쯤 해낸 것처럼 보였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첫 번째는 내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 스스로의 개인사 중 가장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이전에는 내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단순히 문제가 많은 인간이자 문제가 많은 세계라고 생각했고 놀랍게도 나는 가족 중 가장 첫 번째로 이 병을 진단한 의사이자 환자였다.

  번째는 인간은 모두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라는 인간의 특이성에 갇혀서  하나의 케이스만을 유독 꼼꼼히 살피는 의사였기에 병을 우리 가족만의 유전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전병은 세계에 수많은 케이스가 보고되는 질병이며 병마와 싸움하다 죽은 전사자들이 셀 수 없늘 정도로 많단 사실은 나를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벼랑으로 밀어 넣었다. 니체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내가 어찌 극복하랴.

 세 번째는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이 병을 과잉 혹은 축소하여 진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문제를 축소 진단하여 개인에게 잘못을 돌려 스스로를 괴롭게만 만들지 않을 것, 문제를 과잉 진단하여 개인을 병실 속의 환자로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을 것. 문제에 대한 인식은 매일, 매 순간 이뤄질 것. 이 세 가지 명제는 매일 벌어지는 삶 속 여럿 전투에서 패배할지언정 적어도 무언가는 얻게 만들었고 매번 더 나은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지 방법론은 나를 저주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데 일조했고 나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아닌 후천적 돌연변이로 변모해갔다. 나는 그것이 상당히 뿌듯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곧바로 다른 위기론에 맞닥드려야 했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의 사망 소식은 다른 외롭고 고독한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일터로 가던  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큰삼촌의 부고는 꽤나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가족에게  애착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진심으로 가족을 애틋하게 사랑하고 있어서였을까?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기에 그의 사정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였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더욱 슬펐던 것은 요란스럽지 않은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실에 누워 병문안조차 한번 받지 못하고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렸다. 이렇듯 외롭고 고독한 존재의 사회적 질량은  없이 가벼워서 아무도 모르게 잊히고 만다. 나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읽었던 신문  무연고 사망자 광고가 떠올랐다. 삼촌은 그래도 장례를 치를 가족이 있기에 다행인 걸까? 나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의 투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를 다시 침잠하게 만들었다.

  인간 존재의 당위성에 대한 질문은 많은 것들을 자리로 불러들인다. 신은 물론이거니와 철학은 당연하다. 인류 원리와 비관적 유물론까지 끄집어낸다. 이것들은 발음부터 어려워서 평소 쓰는 언어와 무게 자체가 다르다. 그러니   안의 중력은 삽시간에 무거워진다. 침묵의 가르강튀아답이 없을 질문에 무얼 그리 고민하는가? 슬픔의 무게인가? 질문의 무게인가?  안의 온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질 즘에야  고리를 끊고 밥을 먹기로 했다. 날파리가 쇄도하는 초여름의 온도에 나는 국을 올리고 쌀을 씻는다. 조각이  그와의 추억들이 기억들 사이를 비집고 나타나 현상이 된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나는 그를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를 무서워만 했었으니까.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로 그와 연락을  적은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강한 유대감이 그와  사이에 있는 것일까?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는 여전히 가족이란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