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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Sep 14. 2022

서툼에 유예가 끝난 나이 서른

에세이

새해도 아닌데 대뜸, 그리고 새삼 ‘서른’이 내 머리를 흔들어 놨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아이디어인 '서른'은 재밌게도 '스물' 만큼이나 꽤나 감상적인 단어다. 서른은 어째서 감상적인 단어가 됐을까? 열, 스물, 서른, 마흔... 그냥 우리는 10진수에 익숙해서 10번째 오는 것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걸까? 2500년 전 공자 선생께서는 이미 이립, 불혹, 지천명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 두셨고 나는 괜스레 그 언어에 내 삶을 끼워 맞춰 본다.

 그래 내 나이 서른. 서른이 됐다.라는 단순한 아이디어는 어느새 마음을 흔드는 감정이 된다. 어머니 말씀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서른'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깊게 안다. 부처와 예수의 공생애는 공교롭게도 서른부터 시작이었고 멜로가 체질의 주인공들도 공교롭게도 서른이었다. '서른 즈음에'를 나는 군대 갈 즈음, 이등병의 편지와 함께 불렀었다. 신화에서 매스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서른은 감상적이다. 그렇다면 서른은 매우 낭만적인 것인가 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감상적 태도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집을 살 수가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연애를 할 수가 없어서,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 꿈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현실의 무정한 태도가 서른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공자 선생께선 서른을 이립이라고 했다. 일어서는 시기, 일어서고 나면 무얼 보는가. 오! 현실의 높은 벽인가? 나는 벽이라고 하지 않겠다. 시기스런 말투로 현실을 꾸며대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차갑고 냉정하고 무심하다. 나에게 어떠한 것도 바라고 있지 않는 상대에게 불평을 늘어놔봐야 나만 손해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당장에 나를 봐야 했다. 나는 주제도 모르고 잔머리 없이 30여 년의 시간을 겪어낸 나를 본다. 그리곤 그 시간의 흔적에 주석을 달고 있다.

 "이건 이래서 이랬고, 저건 저래서 그랬고, 이건 어쩔 수 없었고. 나는 그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욕망을 참조한 변명의 주석들이 꼬리를 물고 서른의 나이를 역주행한다. 그랬다. 서른이 되었다.라는 문장의 속뜻은 '잘 살아왔나?'였다. 서툴고 서툰 나이를 지나 서른이라는 막간에 도착하면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툼에 대한 유예가 끝난 나이 서른은 어쩌면 가혹하다. 이십 대의 때가 아직 다 벗겨지지도 않았는데 이제 세련되게 살라니. 나는 아직 할 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삶의 중요한 선택들을 모두 떠넘겨 받은 듯한 이 기분은 나를 섬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누가 세련되게 살라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일상의 모든 일들이 늘 있는 일인 듯 태연하게 행동한다.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은 실눈 뜨고 쳐다본다. 모든 일에 전문가처럼 나서고 변호사처럼 과실을 따지고 정의를 선도하고 사람들을 호도한다. 그리곤 또 실수한다. 세련된 척하려다 실패한 인간만큼 낯 뜨거워지는 것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른은 스물보다 수치심을 덜 느낀다는 점이다.

 "부끄러운 것도 금방이다. 삶은 어찌 됐든 지속되고 흘러간다. 그런 시간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수치심이 사라진 자의 변명은 아닐까? 스물처럼 과민 반응하지 않는 게 다행인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이 든 인간의 생존전략은 무감각해지기구나. 어릴 적 봐왔던 어른들의 모순적 태도들은 거기서 비롯됐구나. 서툴지 않기 위해, 키를 잡기 위해, 전문적으로 보이기 위해 나는 무감각해져야 한다. '나 괜찮은 어른이오.'라고 말하기 위해, 어른으로써 충실히 역할을 하고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나는 모든 일에 루틴을 만든다. 나는 성실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프로다. 아마추어가 아니다.


 이런 강박적인 태도에 길이 들을 때쯤엔 아마 마흔,   위를 걷고 있을 테다. 그때는 좀처럼 서툴지 않을까? 어쩌면 그때도 뻔뻔하게 프로인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괜히 서툼에 유예를 두고 싶어 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칭얼대고 낯선 감정을 찾아서 나열하려 든다. 당장은 여행을 떠나기 녹록지 않으니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 잡아끌어 낯섦을  자리에 끌어들인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 기꺼이 서툰 일상을 겪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느끼지 않는가. 매일의 일상 속에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야겠다. 그렇게 나는 서툼을 유예한다. 서른을 유예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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