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상이 되다니

못생긴 내 청춘

by 문기사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고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혼자 가는 외국 여행이라서 잠이 잘 오지 않았었다.


공항버스를 20분 정도 기다렸는데 좌석이 부족하다며 내 앞사람까지만 태웠다.

인천공항까지 택시를 탈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30분을 더 기다렸다.

너무 들떠 있었나 보다.

도착하고 보니 김포공항이었다.

환장할 상황이었다.

허겁지겁 인천공항 행 버스를 찾아서 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발권 데스크엔 내 앞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2명뿐이었다.


가방 하나로 짐을 꾸렸더니 가방이 좀 커졌다.

직원이 가방의 무게와 크기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위탁 수하물로 보내라는 권유를 했다.

장시간 비행에 필요한 물건들이 가방에 많이 들어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설왕설래 후 결국 기내로 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로밍 데스크에서 줄을 섰다.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 한 분이 직원의 설명을 도무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히말라야를 가는 건가, 그럼 로밍할 필요도 없겠는데 뭘 그렇게 오래 걸려?


화장실에서 또 줄을 섰다.

여자 화장실은 역시 부족했다.

가방을 낑낑대고 좁은 변기칸까지 끌고 들어가서 용변을 보려니 비좁아서 운신하기도 옹졸했다.

가방 맡길 동행도 없었으니.

여행은 혼자 할 게 아니라지만 함께 할 사람이 없으면 외국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죽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검색대에서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한 내 가방을 열어보자고 했다.

샴푸가 100ml를 초과하는 용기에 담겨 있었다.

가방을 열어놓고 여권, 티켓, 샴푸만 들고 별도의 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갔다.

약국에서 또 줄을 섰다.

빈 용기를 사서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옮겨 담았다.

내 소중한 머릿결을 위해서 샴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출국 심사대에서 직원이 나를 꼼꼼히 살펴봤다.

그래, 나 눈만 쫌 손 댔다. 비싸고 정신 없어서 여권 사진은 못 바꿨다. 그렇게 티 나냐?

누가 뭐래? 규정상 얼굴이랑 대조해보는 것뿐이야.

그래? 난 또 너무 오래 쳐다보길래.

3초밖에 안 봤다. 그리구 요즘 성형이 뭐 죄냐? 왜 날 똑바로 못 봐?

됐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도장이나 찍어.

다음엔 성형하면 사진도 좀 바꿔라.

출국심사대 직원과 훈훈한 마음의 대화를 나눴다.

남들보다 다섯 배는 시간이 더 걸린 것 같았다.

실제로 날 오랫동안 쳐다보긴 했다.


뛰었다.

옷이라도 컨셉에 맞게 자주 갈아입으려고 많이 넣었더니 가방이 무거워 속도가 잘 안 났다.


에스컬레이터의 한 줄 서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콧바람을 계속 씩씩거려도 도무지 비켜주지 않는 눈치 없는 민소매 여자의 빨간 모자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맞다. 고추장. 고추장 넣었지?

배가 고프다는 게 그제서야 느껴졌다.


공항 내에 있는 전철을 타야 했다.

줄이 또 길고 사람들 또 많았다.

비좁은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가방을 헤집어 기름 종이를 꺼내 얼굴을 두드렸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눈 앞이 번들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게이트 근처에 도착하자 전광판에 'Last Call'이라는 글자가 깜빡이면서 방송으로 내 이름이 불려졌다.

공항 내 박소령 승객께서는 123번 게이트로 오셔서 속히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뭐 대충 이런 멘트가 공항 구석구석을 쩡쩡 울렸던 것 같다.

아빠는 왜 내 이름을 소령이라고 지었는지, 그럴 거면 차라리 대령으로 짓지.

게이트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모두 내게 거수경례를 할 것 같았다.


티켓 스캔이 끝나고 게이트를 통과하여 꿀렁꿀렁한 복도를 뛰어서 비행기 문으로 향했다.

뒤에서 공항 직원들의 우렁찬 경례 소리가 들렸다.

추~ㅇ 성. 소령님, 잘 다녀오십시오.


도망치듯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비행기 문을 닫았다.

출발 직전의 고요함 속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날 주목했다.


앞에서 두 번째 자리.

늦게 오긴 했지만 내 가방 넣을 공간도 비워놓지 않다니. 소령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군.

칸에 나의 가방을 욱여넣었다.

모든 게 끝났다.

휴~.


툭.

좌석에 막 앉으려는데 짐칸이 열리고 내 가방이 떨어지려고 했다.

오마이갓! 너무 억지로 넣었구나.

든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금방 화장실에서 나온 아저씨도 바지춤을 잡은 채 나의 가방을 주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우아하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목베개를 꺼내지 않은 게 생각이 나서 마치 목베개를 꺼내려고 일부러 그런 것인 양 태연한 척하며 목베개를 꺼내고 다시 가방을 칸에 넣었다.

진짜 끝났다.


퍽.

뭔가 물컹한 게 밟혔다.

뿌지직.

터졌다.

고추장이었다.

에이 ×발.

의도치 않은 시옷 발음이 예상치 않은 고추장 냄새에 실려 기내에 퍼져나갔다.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고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아니,

내게 필요한 건 여행보다 남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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