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별이 다 아픈 건 아니다
대학교 4학년 때 난 다른 대학생들처럼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려야 했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졸업은 무난히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졸업 후에 날 오라고 하는 회사는 없을 것 같았다.
낮엔 학교에서 강의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가끔 입사원서 내고 논문도 쓰는 식으로 보내고 저녁 5시부터 밤 12시까지는 편의점에서 일했다.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하고 저녁 식사는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편의점에서는, 먹어도 되지만 판매할 수는 없는 음식이 매일 나온다.
그 음식은 나의 저녁 식사로, 때로는 아침 식사까지도 해결해주었다.
청춘!
모든 청춘이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나의 스물다섯 번째 가을은 여친으로 인해 아픈 시절이었다.
그 가을 나에겐 동시에 세 명의 여친이 있었다.
세 명의 여친은 각자 서로의 존재를 모두 모르고 있었다.
내가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고, 서로 마주치기 어려운 시간대에 각자 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여자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친, 여자이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여친, 여자이면서 친구인 여친이 그들이다.
여자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친은 주로 밤 7시30분에서 8시 사이에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 들렀다.
간혹 편의점에 들르지 않더라도 그녀는 거의 매일 그 시간대에 편의점 앞을 지나 집으로 갔다.
전철역 3번 출입구를 나온 그녀는 편의점에 들러 물건을 산 후 행촌의원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골목 입구에서 오르막길 위쪽의 성당 방향을 바라보며 큰 숨을 들이쉬곤 했다.
그런 날은 그녀가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거나 짧은 치마를 입은 날이다.
그녀가 구입하는 물건을 보면 그녀는 혼자 사는 게 분명했다.
라면 한 개, 치약 한 개, 캔커피 한 개, 과자 한 개, 생수 한 병.
월요일 밤에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직장녀이고 쉬는 날은 월요일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 대해선 전혀 궁금한 게 없는 듯 꼭 필요한 질문만 짧게 했다.
"포카칩 어딨어요?" 아니면 "스팸 어딨어요?"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녀의 질문에 항상 친절하고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맨 아래 칸 보시면 됩니다." 혹은 "왼쪽 위에서 두번째 칸에 보이네요."
나는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전부 다 물어볼 수 없기에 아쉽지만 정말 궁금한 것 한두 가지만 늘 진지하게 질문했다.
"포인트카드 있으세요?" 아니면 "봉투에 넣어드릴까요?" 정도였다.
정말로 궁금해 하는 나의 질문에 대해 그녀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아니요."
그녀는 도도하고 예쁜 여친이었다.
여자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친이 가고 나면 밤 8시에 여자이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여친이 찾아왔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한 2년 전보다 훨씬 전이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난 그녀와 급격하게 친해졌다.
계산대 안쪽에 있는 DMB 속의 그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새로운 소식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녀보다 더 일목요연하게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난 그녀가 전해주는 소식에 항상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면 "저런! 썩을 놈들." 정도였다.
안타까워 하는 나의 반응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준비한 소식을 아름답고 반듯한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그러면 나도 가끔은 아름답고 반듯한 목소리로 반응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마디를 응답하고 나면 8시 35분쯤 그녀는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한 후 나와 헤어졌다.
그녀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난 그녀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난 그녀에게 주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
그녀는 똑똑하고 예쁜 여친이었다.
여자이면서 친구인 여친은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그녀의 퇴근 시각은 밤 8시였고 편의점까지는 약 40분이 걸렸다.
여자이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여친이 가고 나면 그녀가 편의점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모아서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앞치마를 두르고 편의점 이곳저곳의 일을 했다.
월급은 내가 받지만 내 할 일의 3분의 1 정도는 그녀가 했다.
한 시간 남짓 함께 편의점에서 먹고 일하고 얘기하고 놀고 공부도 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으면 그녀는 집으로 갔다.
그녀는 편의점을 나설 때 항상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
그녀는 그냥 여친이었다.
그해 가을 어느날 여자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친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그녀는 목장갑 한 개,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한 개, 마스크 한 개를 사갔다.
그날 난 "포인트카드 있으세요?"라고 질문을 했지만 '혹시 이사 가세요?'라는 질문도 너무나 하고 싶었다.
그날 후부터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동안 나와 마주쳤던 눈빛, 주고 받았던 카드,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뒤로 한 채 아무런 인사 없이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이면서 친구인 여친은 그날도 밤 8시 40분쯤 와서 나와 함께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청소하고 진열하고 계산하고 얘기하다가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 집으로 갔다.
다음 날 여자이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여친이 조만간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결혼에 대해 수군거렸다.
결혼으로 인해 떠나는 것이고 당분간 한 남자의 아내 역할에 전념하겠다는 말을 할 때는 덤덤했는데, 지난 5년 동안 자신을 사랑해준 것에 감사한다는 말을 할 때 그녀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이면서 친구인 여친은 그날도 밤 8시 40분쯤 와서 나와 함께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청소하고 진열하고 계산하고 얘기하다가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 집으로 갔다.
다음 날 하늘은 쓸데없이 맑기만 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