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데 없다는 사회적 시선, 살다 보면 뭔가 생긴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열풍은 대단하다 못해 과열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보이는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우자.’는 글은 이제 당연한 수준이고, 트리링구얼, 쿼드링구얼까지 욕심내는 부모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얼핏 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외국어 세 개쯤은 할 줄 아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정작 외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돌아오는 시선은 차갑기 일쑤다.
내가 일본어 책을 처음 샀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이랬다.
“일본어는 배워봐야 쓸 데가 없다.”
“일본어는 흔한 언어다.”
격려는커녕, 시작도 하기 전에 ‘쓸모없다.’는 말로 입구컷을 당한 셈이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그날로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학습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늘 이런 말을 들었다.
“영어만 잘하면 전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데 굳이 일본어가 왜 필요해?”
“영어가 기본이지, 일본어는 안 해도 돼.”
“일본어 배우면 영어 발음 나빠진다던데?”
“그거 배워서 쓸 데 있냐?”
무수한 반대 의견을 들어야 했다. 배우려는 건 나인데, 왜 정작 배우지도 않는 사람들이 더 시끄러운 걸까. 더구나 그들이 과연 영어라도 잘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어를 계속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빛을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는 2, 3학년 때 일본어 수업이 있었는데, 나는 이미 독학으로 교과서를 끝내둔 상태였다. 시험 기간이 되자, 준비 안 한 친구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했다. 정작 1학년 때 내가 같이 하자고 권유했을 때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했으면서 말이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자습 시간, 시험 범위가 넓다며 투덜대는 3학년 선배가 있었다.
“선생님, 일본어 시험 범위가 1단원부터 6단원까지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래? 뭐가 문제인데?”
선생님이 웃으며 되물었다.
“범위가 너무 많아요.”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나를 불렀다.
“슬기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저는 문제없어 보이는데요.”
선배는 억울하다는 듯 “너는 2학년이잖아”라고 항의했지만, 선생님은 한마디 덧붙이셨다.
“야는 이미 혼자서 교과서 다 떼 버렸다.”
그 순간, 선배는 더 말하지 못했다. 나에게 일본어가 처음으로 ‘쓸모’를 증명해 준 순간이었다.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일본어를 쓰게 된다. 기회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끌려 나오고, 덕분에 놓칠 뻔한 기회들을 잡을 수 있었다. 입구컷에 주저앉았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다.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농담거리’라는 책 제목처럼, 그때의 반대는 이제 내 안의 농담거리로만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워서 뭐하냐?”던 사람들은, 정작 결과가 나타나면 “그런데 왜 안 쓰냐?”고 되묻곤 한다. 모순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