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몫을 누리자
월요일, 마음이 아찔스레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어딘가 단단히 고장이 난 모양인데, 이번엔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났는지 도통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생각하고 밀려들어오는 온갖 감정에서 헤엄을 쳤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도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마음 수영은 잘 해내랴. 꼬르륵, 내 사랑하는 동생이 그리하였을 것처럼 나도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먼저는 떠나보낸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동생을 향한 그리움엔 안타까움이 섞여있다. 네 살 때 사고가 났으니, 우리의 추억은 고작 4년이지만 식물인간이 된 후로 17년을 더 버텨주었으니 도합 21년의 추억이 있는 셈이다. 4년만큼의 웃음과 17년만큼의 슬픔, 그리고 동생이 살아있었다면 우린 아주 좋은 인생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동생이 식물인간으로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는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러 가지 못했었다. 그 당시 준비하던 임용시험이 끝나면 다시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 결국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동생을 떠나보냈다.
그 약속을 지켰더라면 나는 마음이 덜 아팠을까.
아빠를 향한 그리움엔 미움이 섞여있다. 애증,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사랑만 했거나 또는 미워만 했어야 했다. 사랑과 증오 사이의 어느 언저리에서 삐걱거리던 시소는 묘하게도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사랑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었다.
아빠에게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빠의 마음은 오죽 괴로웠을까 싶다.
아빠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고개만 힘겹게 끄덕인다던 그때 아빠를 보러 갔다면 마음이 좀 더 괜찮았을까.
나는 아빠에게, 아빠는 나에게.
우린 마지막으로 어떤 눈물을 주고받았을까.
강아지 메리를 향한 그리움엔 행복과 자책이 함께 묻어있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돌봐주었는데도 ‘이렇게 했다면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시시때때로 울컥 치밀어 오른다.
개를 개처럼 키웠어야 했는데 동생처럼 자식처럼 키워버렸다. 그래도 그렇게 키웠으니 그나마 지금을 버틸 수 있다.
메리가 떠나던 날, 출근 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메리의 눈빛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어차피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프리랜서인데 30분 정도 출근이 늦더라도 그 시간 동안 너를 더 안고 쓰다듬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나는 후회가 덜 했을까.
살아남은 자의 몫, 그것은 지독한 그리움과 자책과 미안함과 사랑을 이고 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마음이 엉키고 설켜 월요일부터 두통이 시작됐다. 왼쪽 뒤통수부터 정수리까지 저릿한 느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됐다.
아으- 또 모든 일에 너무 신경을 쓴 탓이다.
지금은 가르치는 아이들의 중간고사 기간이다.
분명 시험을 보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이들인데, 정작 내가 더 긴장을 했다. 성적을 잘 내야 하는 학원 강사의 숙명이 어깨와 목의 근육을 돌처럼 굳게 했다.
아이들의 시험 전 날엔 새벽 3시까지 잠을 설쳤다.
마치 이번 시험에 내 강사인생을 다 건 것처럼, 마지막수업에서 찍어준 문장들이 모두 출제가 되길 바랐다.
그뿐인가, 결혼식은 자꾸 빠르게 다가오는데 예비신랑도 나도 너무 바쁘다 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할 수가 없다.
식순을 정하고, 사회자 대본을 쓰고, 음악을 다운로드하여 꿈꾸던 결혼식을 만들어가 본다. 하지만 이미 예식장에서 정해준 메일 제출 기한을 훌쩍 넘기고야 말았다.
게다가 LH, SH에 올라온 공고문을 읽고 신혼집으로 적당한 곳을 찾아 계속 청약신청을 넣느라 고민에 고민이 끝나지 않는다.
브런치에 글을 아무리 못 올려도 4-5일을 넘기지 않았는데 도무지 글을 쓸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다.
자려고 누우면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손을 들고 외쳐댄다. “내가 먼저 튀어나갈 거야!” “아유, 내가 먼저야!”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들 사이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겨서까지 잠을 못 이룬다.
결혼식 준비는 아직 마무리가 덜 됐지만,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져 내일 오전까지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시험에 반드시 나오리라 당당히 찍어준 문장들이 기적처럼 100% 출제가 되어 아이들은 시험을 잘 봤다.
LH에서도 3배수에 뽑혔다며 서류를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신경 쓰고 예민했던 일들이 해결되어 가니 뒤통수의 저린 느낌도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금요일까지 여전히 으리~한 느낌이라 신경외과를 갔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점쟁이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체질이 그래요, 기가 약해! 맥 짚어보면 맥이 약할 거야. 좋게 말하면 천상 여자인데 매 사에 너무 예민한 공주 띠야~ 저혈압에 손발이 차고.”
“..네!”
신경외과에 온 건지, 한의원에 온 건지, 점집에 온 건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살아보니깐 안 되는 건 안돼~ 너무 집착하지 마.
환자분은 공주 띠라서 아기 낳으면 친정 엄마가 있어야 되는 스타일이야~“
“아하하.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딱 보면 알어!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도 통증은 반으로 줍니다.”
“MRI는 안 찍어봐도 될까요?”
“아이, 그런 거 안 해도 돼요.”
그리고 이어지는 의사 선생님이 말이 물리치료를 받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인생을 즐겁게 사세요~!”
정답이다.
주사 두 방을 맞고, 뇌 순환을 돕는 약과 신경 안정제가 포함된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았지만 그보다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가 가장 효과가 직방이었다.
인생을 즐겁게 살자.
살아남은 자로서 감당해야 할 몫은 자책하는 마음과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몫까지 이 세상을 좀 더 즐기는 것 또한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살던 때를 잊고 있었다.
자책하는 마음이 들 땐, 먼저 떠난 이들이 내게 이 삶을 더 즐기고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생각해야겠다.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후회가 머무르는 곳간에는 즐거움이 함께 놓일 자리가 없다.
기억하자.
먼저 떠난 이들이 내게 아픔을 남긴 것이 아니라,
내 아픔까지도 모두 안고 간 것임을.
그리하여 덕분에 내게는 사랑만 남았음을.
그립다는 이유로 스며드는 자책과 후회를 내던지고, 그들을 추억하며 남은 생을 즐거이 흘려보내는 것 또한 살아남은 자의 몫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