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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05. 2020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30대 직장인 자가 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1

30대 직장인 자가 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1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그때도 아파트는 제법 있었겠지만,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주소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성북구 어디쯤이었을 거다. 나는 학창 시절을 대체로 그 인근에서 보냈으니까. 당시에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방은 세 개쯤 있었고, 엄마 아빠가 머무는 안방, 할머니가 계시는 방, 그리고 내 방이 있었다. 거실엔 피아노가 있었고, 집 안에는 화분이 많이 있었다.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래된 앨범을 뒤적여본 바로는 내 방 안에 분홍색 2층짜리 쥬쥬의 집과 각종 전집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표현이다. 나는 떼쟁이보다는 순한 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울고불고 길바닥에 주저앉기보단, 사달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해 우물쭈물 몸을 배배 꼬는 편이었다.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편식하고, 자주 아팠다. 이래서 엄마는 아직도 내가 순하고, 할 말 잘 못하고, 음식도 잘 안 먹는다는 선입견이 있다.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을 때면 남편은 기함을 한다. '어머님, 얘가 얼마나 잘 먹는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엄마 눈엔  출가한 지 5년도 넘은 딸내미가 아직도 겁이 많아 문지방을 못 넘어 한참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런 아이 정도인 거다.






여하튼 그 집에선, 그 집 마당에선 '행복이'라는 개를 키웠다.



품종이 딱히 있지 않은 그냥 개였다. 어디서 왔는지, 왜 우리 집에서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골 외갓집에 아는 누가 키우던걸 내가 졸라서 받아왔을지도. 사료를 주거나 산책을 시켜주지는 못했고, 마당에 목을 묶어놓고, 집에서 먹고 남은 음식들을 섞어 '개밥'을 만들어 줬다. 요즘처럼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높을 시절은 아니었지만 나는 행복이를 꽤 사랑했다. 행복이는 이름처럼, 행복한 우리 집의 상징이었을까?  가족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외삼촌에게 행복이를 부탁했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옆집 사는 이웃에게 친히 우리 집 대문 열쇠를 맡겼다. 행복이는 그만큼 중요한 식구였다. 행복이에게도 작은 집이 있었다. 빨간 지붕과 파란 몸통이 있고 나무판자에 '행복이 집'이라는 명패까지 단 집이었다. 행복이는 집 안에 반쯤 몸을 들이고 앞발에 머리를 기대어 잠을 자곤 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눈을 뭉쳐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행복이 집 옆에 세웠다. 다음날이면 행복이의 앞발 뒷발에 으스러져있곤 했지만 행복한 우리 집에서는 눈이 오면 반드시 눈사람을 만들었다.






우리 집은 제법 컸던 것 같다.



한 대문 안에 우리 집 말고 방 한 칸, 거실 하나짜리 별채가 있었는데 거기에 나의 외삼촌 부부가 살았다. 둘은 갓 결혼한 신혼이었고, 가끔 나를 맡아 놀아주곤 했었다. 외삼촌 부부에게도 아이가 생기며 우리 집을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적당한 거리에 살며 명절마다 한 번씩 보곤 했다. 그리고는 서로가 더 멀리 이사를 가며 보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특히나 더. 사촌동생이 2명 있지만 어린 시절 이후로는 왕래가 거의 없었다. 큰 애가 군입대를 한다고 했을 때는 늙은이 같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걔가 벌써 군대를 갔어? 완전 어린애였는데!'  나는 외삼촌이 나와 꽤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꽤 오랜 시간 잊고 지냈었다. 재작년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외삼촌이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그리고 일주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되면서야 그 사실이 생각났다.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아빠보다, 외삼촌은 엄마의 살림을 더 도왔다. 이사를 하거나, 집을 고치거나 할 때는 꼭 우리 집에 와줬다. 한 번은 현관 도어록이 고장 났었는데, 엄마는 열쇠집 보다 외삼촌을 먼저 찾았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기억들이 장례식장에서야 떠올랐다. 남들 조문이야 여러 번 가봤지만, 나에게 가까운 가족의 상을 치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의 동생, 촌수로는 삼촌. 그래도 회사에서 인정하는 경조사의 범위 축에는 들지 못했다. 급히 개인 연차를 써야 했고, 장례지도사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군 복무 중인 사촌동생이 날벼락 맞은 듯 상주로 서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 염하는 곳으로 가족이 모였다. 혈색이 없었지만 삼촌은 죽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좀 피곤한 채로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은데, 장의사는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권했다. 무너져 내리는 엄마를 보기 힘들어 고개를 떨궜다. ' 잘 가 내 동생...' 엄마의 마지막 인사가 기억난다. 나는 형제가 없어 평생 느끼지 못할 감정이겠지. 나의 동생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것. 나의 부모는 언젠가 나보다 먼저 가신다는 암묵적인 마음의 준비를 하겠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겠지. 외삼촌의 장례는 수목장으로 치렀다. 급히 알아봤지만 삼촌이 영면을 취하기에 손색없는 곳이었다. 화장한 유골을 묻고, 그 위에 작은 나무를 심었다. 엄마는 나무를 좋아한다. 베란다에도 크고 작은 화분을 들인다. 엄마의 동생이 작은 나무가 되었다. 돌아가며 흙을 덮고, 눈물을 뿌렸다.






외삼촌이 별채에 머물렀던 그 집은, 좀 언덕 위에 있었다.



유치원 가는 버스는 집 앞까지 왔던 것 같은데, 국민학교 등교하는 버스는 큰길까지 꽤 걸어 내려갔던 것 같다. 그 당시 엄마의 교육열은 아주 높아서, 나는 유치원을 졸업하고 교복을 입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모자부터 목 폴라티, 조끼형 원피스, 면 스타킹, 활동용 체육복까지 일체였다. 한창 분홍색을 좋아할 나이였는데, 남색 교복과 초록색 체육복은 정말 최악. 그보다 더 싫었던 것은 그 학교가 있는 위치였다. 지근거리에 걸어 다닐 수 있는 다른 국립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그 학교는 커다란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는 정해진 코스를 정해진 시간에 지나갔는데, 정류장에 학생이 나와있지 않으면 정차도 하지 않고 지나칠 만큼 야박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꽤 먼 축에 속해 가장 먼저 셔틀버스를 타야 했고, 버스를 놓치면 토큰을 내고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10 정거장 넘게 달려 학교 근처 정류장에 내리면 학교까지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고된 등굣길.  '왜 모든 건 다 언덕 위에 있지? 언덕은 정말 싫어!'라는 생각을 줄곧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2학년이 좀 지났을 무렵, 전국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즈음에 나는 드디어 평평한 땅에 지어진 학교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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