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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05. 2020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2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2

우리가 이사 간 곳은 경기도 하남시였다.



지금 보면 지척인데, 나는 당시에 우리가 서울을 떠나 영 시골로 이사를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이사 가는 곳은 아파트라서, 행복이는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럼 행복이는 어디서 살아?' 행복이는 할머니 아는 친구 집에서, 마당이 우리 집보다 훨씬 넓은 집에서 살 거라고 했다. 행복이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엉엉 눈물이 났다.  '할머니도 안 가.'  할머니는 이모할머니와 함께 사신다고 했다. 그건 괜찮았다. 나를 볼 때마다 말린 감이며, 약밥이며, 이것 저것 먹이고 식사 후엔 꼭 직접 빚은 감주를 내어주던 시골 외할머니와는 달리, 도시에서 장사에 손이 닳은 친할머니는 정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 역시 아주 가늘고 높았다. 전화를 받을 때면 '여보쎄-요' 하며 말 끝이 올라갔고, 엄마에게도 이러쿵저러쿵 맵살맞은 잔소리를 했다. 나에게는 그래도 참을만한 정도의 소리들이 쏟아졌는데, '티브이를 가까이서 보지 말아라' , ' 야채를 많이 먹어라' 류의 것들이었다.  할머니 방에는 고급 화장품이 많았다. 엄마도 잘 바르지 않는 루즈가 색색별로, 분통과 매니큐어도 있었다. 커다란 화장대 한켠에는 검은 가죽커버에 금박이 입혀진 성경책이랑, 찬송가 책이 있었는데 볼 때마다 나를 앉혀서는 주기도문이라던가, 아니면 주님을 찾는 찬송을 불러주곤 했다. 그 책들은 일반 책들이랑은 달라서 한 장 한 장이 아주 얇고, 넘길 때마다 챙챙이는 소리가 났다. 어딘가 하나도 신이 나지 않는 노래가 끝나면 항상 하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했다. 그러려면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야 한다고. 이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천국에는 아직 가고 싶지 않고, 일요일 아침에는 만화영화를 봐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를 영 따르고 싶지 않았다.



당시 할머니와, 할머니의 자매인 이모할머니는 남대문에서 꽤 크게 아동복 장사를 했다. 베이비붐 세대와 맞물려 아동복 시장이 흥했고, 특히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청', 그러니까 데님을 소재로 한 제품을 주로 제작해 도매로 판매했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고 한다. 고무줄을 넣은 아동용 청바지, 멜빵바지, 청자켓류였는데, 그 시대 유행이랑 잘 맞았다. 할머니가 당장에 돈이 궁해 억척스럽게 장사를 했느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월남전과 6.25에 참전한 군인이었고, 그 공로로 현충원에 묻힌 유공자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연금으로 노후가 든든했다. 그래도 뜻이 맞는 자매와 함께 퍽퍽한 장사에 나섰고, 거기서 돈 이상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나에게나 할머니지, 사실 그 당시 할머니는 50대 중반이었으니, 한창때였다. 잘 되는 사업을 놓고 아들 내외 따라 시골까지 갈 다른 행복이 없었던 거다. 여하튼 할머니는 서울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왜 시골에 가는 거야?' 아빠가 새로운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서울 집도 정리한다고.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초등학교 2학년 2학기를 그곳에서 맞았다. 아파트부터 학교까지 쭉 뻗은 평지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높은 곳에 있었다. 606호. 다행히도 예전 집처럼 언덕을 오르는 수고는 필요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띵동, 현관이 나타났다. 우리 집 위로는 더 많은 집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우리도 그중에 한 식구가 되었다.  새로 다니는 학교에는 교복이 없었다. 학교 이름이 크게 새겨진 체육복 티가 전부였다. 스쿨버스도 없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서 조금만 걸으면 학교에 닿았고, 학교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문방구, 분식집들도 있어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서울 학교에서처럼 수영과 스케이트를 배울 순 없었지만, 방과 후 교실에 발레반이 있었다. 일단 공주 같은 옷을 입고 하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더불어 운동 신경은 꽝이지만 유연성이 제법 좋았기 때문에 동작 몇 개만 해도 칭찬을 받는 점이 좋았다. 발목을 기이하게 꺾는 다섯 가지 기본 발 동작을 배웠는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척척. 어렵지 않았다. 켁켁 숨이 막히던 수영이니, 허구한 날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던 스케이트에 비하면 백번 나았다. 학교를 마치면 우리 아파트 놀이터가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주택에 살 때는 몰랐는데, 이 놀이터라는 곳은 놀이와 사교의 장이다. 특히 대단지 아파트에는 꼬불꼬불한 미끄럼틀이랑 밧줄이 걸린 오르막판, 뺑뺑이, 구름사다리 같은 것들이 있어 여럿이 편을 먹고 놀기에 제격이었다. 모래 판에는 금을 그어 땅따먹기도 했다. 한참을 놀다가 저녁시간 무렵 하나 둘 친구 엄마들이 우리를 찾으면 302호라던가, 1105호 등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파트 놀이터 덕에, 전학 온 서울 뜨내기였지만 친구를 사귀기 쉬웠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단짝 친구가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같이 발레를 하는 여자아이였는데, 남동생이 한 명 있었고,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갔다. 우리 집에 게임팩으로 하는 오락기가 있어 게임도 함께 했던 것 같다. 학급에서도 같은 반이었는데, 키나 외모, 성적까지 여러모로 나와 비슷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둘을 예뻐했다. 시에서 주최하는 초등부 콩쿠르에 학교 발레반이 나가게 되어 그 친구와 아주 기뻐했던 것 같다. 나의 기억력이 놀랍도록 형편없는지, 꽤 친했던 친구임에도 이름이나 얼굴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친구는 꽤 발레에 소질이 있던데 반해, 나는 그저 예쁜 옷에 취미가 있었고 의지가 나약했다. 콩쿠르를 한 번 마친 뒤 발목이 아프다고 투덜거렸고, 발레반에 출석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어쩌면 진작에 김이 샌 것이 다행이었다. 발레라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면 나는 진작부터 예중과 예고를 염두에 둔 입시 발레를 병행했어야 했다. 약간의 유연성을 빼고는 박자감이라던가, 표현력 같은 특출 난 재능이 없었으므로, 사실 때마침 부족한 의지는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이었다. 재능 없이 열정 하나로, 예술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힘든 일인지 지금의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아빠가 한다는 사업은 볼링장이었다.



덕풍동에는 제법 큰 규모의 스포츠센터가 있었는데 지하 한 층이 아빠가 하는 볼링장이었다.  학교나 학원이 열지 않는 주말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 볼링장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오색 찬란한 볼링공들이 중앙에 있었다. 나는 작고 어리고, 운동에는 영 취미가 없었으므로 한 번도 굴려본 적 없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몰려와 색깔 공을 고르고, 굴리는 모습은 의아할 지경이었다. 저 무거운 색깔 공을 굴려 불쌍한 핀을 쓰러뜨리고, 다시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어린 내 눈에는 예쁜 옷에 고운 화장을 하고 우아한 몸동작을 하는 발레에 비하면, 볼링은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종목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와서 볼링을 치고, 때론 손님이 너무 많아 카운터 앞 벤치에서 순번을 기다렸다. 사업은 꽤 성했던 듯싶다. 2년이 채 안 되어서, 아빠는 볼링장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아빠가 진짜로 하고 싶던 것은 따로 있었다. 볼링장은, 그것을 위해 한 차례 해본 연습게임 같은 것이었다. 맥락 없이 나와 엄마도 함께 따라나서야 했다. 처음 서울을 떠날 때 걸리는 것은 행복이 정도였는데, 덕풍동을 떠나는 것은 더 큰 상실감이었다. 아파트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많았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이사를 간다는 것은 이들과의 인연은 영영 끝이 난 것과도 같았다. '또 놀러 올게!' 눈물을 훔치며 작별인사를 했다. 단짝 친구 남매에게 아끼던 게임팩을 선물로 주었다. 어차피 이 둘이 없으면, 나는 게임을 할 상대도 없을 것이다.



또 새로운 곳으로, 나는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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